[파워 오브 도그] 리뷰
개봉: 2021년
감독: 제인 캠피온
출연: 베네틱트 컴버배치(필), 제시 플레먼스(조지), 커스틴 던스트(로즈), 코디 스밋 맥피(피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영화를 먼저 보고 글을 읽어주세요.]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여러 가지 감각이 남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에게 남겨진 느낌은 시원한 통쾌함에 가까웠다. 악당의 역할을 부여받은 필이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치렀기 때문은 아니다. 영화 초반부터 조금씩 쌓여가던 나의 의심이 결국은 진실이었음을 확인시켜 준 결말에서 받은 후련함이었다. 어떤 이들은 예상치 못했던 결말의 대반전에 놀랍다는 평을 했지만, 나에게는 거미줄처럼 얇아서 색상을 알아보기 힘든 실크를 여러 장 겹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색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영화 속 많은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각 장면들이 의미하던 바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결말이었다.
영화 초반의 피터는 섬세한 손으로 종이꽃을 만드는데 종이를 자르는 가위 소리가 유독 차갑고 섬뜩하게 느껴진다. 날카로운 가위 날이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자를 것처럼 불안하다. 큰 키에 깡마른 몸의 피터는 영화 속 가장 약한 인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방금 전까지 사랑스러운 손길로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바로 다음 순간 그 목을 비틀 수 있는 사람을 도저히 약하게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여리게 보이는 신체 속에 누구보다 냉정하고 잔인한 마음을 가졌다.
이에 비해 필은 강하고 거친 외모와 강압적인 목소리로 마초처럼 행동하지만, 영화 속 인물을 통틀어 가장 여리고 연약한 사람이다. 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밤에 혼자 잠들지 못하고 동생을 찾아다닌다. 그의 마초적 외양은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가면이다. 거친 서부에서 살아남기에 성소수자인 그의 마음은 너무나 연약하다. 그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은 영화 중반 필이 브롱코 헨리의 이니셜이 새겨진 스카프와 함께 있는 모습에서 직접적으로 암시되지만, 사실은 영화의 초반부터 의심스러웠던 순간이 있었다. 소를 팔기 위해 마을로 내려온 필이 식당에서 종이꽃을 만지는 장면이다. 피터가 만든 종이꽃의 꽃술을 파헤치며 쓰다듬는 필의 손가락은 어쩐지 나에게 성애적인 느낌을 주었다. 더욱이 그 꽃을 만든 사람이 피터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는 그의 표정과 일부러 꽃을 불태우며 피터를 망신 주는 그의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필의 마초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끈적한 손가락이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이후 필이 브롱코 헨리의 안장을 쓰다듬는 장면에서 또 한 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의 몸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손길에서 나는 모든 카우보이들이 신화처럼 떠받드는 브롱코 헨리와 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필의 모습에서 본다면 뛰어난 카우보이, 마초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던 거세 장면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영화 속 소의 거세 장면은 불필요하게 자세히 보여주는 것 같다. 1500마리를 거세하였다는 필은 주변의 우려에도 일부러 맨손으로 작업을 한다. 소에게서 남성성을 없애는 것. 그것이 그의 성적 지향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필의 마지막은 필과 피터의 소풍 장면에서 예상할 수 있었다. 그전에 일부러 탄저병에 걸린 소의 가죽을 조심스럽게 잘라내던 피터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것이 필을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터가 통나무 더미에 깔려 다리가 부러진 토끼의 목을 비트는 순간, 풀잎을 적시던 피는 토끼의 피가 아닌 필의 피였다. 그 순간 결국 필의 목을 죄는 것은 피터일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필이 탄저병으로 죽은 소의 가죽으로 피터를 위한 밧줄을 만드는 순간에도 피터는 브롱코 헨리의 안장을 만지며 필에게 말을 건다. 마치 그가 브롱코 헨리의 빈자리를 채워 줄 것인 양. 그 잔인함과 냉정함에 놀랄 따름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목욕하지 못했던 필은 죽고 나서야 깨끗이 목욕하고 자리에 눕는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반전의 결말이었을까? 아니면 브롱코 헨리가 그랬듯이 ‘산 그림자 속에 숨겨진 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과 ‘그저 산의 모습만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달리 보이는 영화였을까? 결국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면 없는 것’과 같은 것일까?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다시 발견하게 된 부분은 영화의 초반 피터가 스크랩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로즈에게 ‘맨션에 살고 싶어?’라고 묻는 장면이다. 처음 볼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그들이 가리킨 그 집은 조지의 집과 아주 흡사하였으며, 결국 로즈는 피터가 말한 것처럼 사진 속 그 집에서 청소부를 두고 살게 된다. 영화 초반 피터의 “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엄마를 구할 수밖에”라는 내레이션이 달리 들리게 되는 지점이다. 과연 어디서부터가 피터의 계획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