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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Mar 04. 2022

아네트를 위한 노래

영화 [아네트] 리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오페라 배우 ‘안’은 수시로 사과를 먹는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애인과 함께 있는 침실에서도… 빨갛게 익은 사과를 껍질째 크게 한입 베어 무는 그녀의 모습은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브’를 떠올리게 한다. 금지된 과일을 먹은 대가로 출산의 고통을 얻게 되었다는 이브처럼 안은 곧 임신을 하고 아네트를 낳는다. 




안의 남편이자 스탠딩 코미디쇼를 공연하는 헨리는 ‘신의 유인원’으로 소개된다. 말 그대로 신이 만들어 낸 유인원, ‘아담’이다. 그의 코미디 쇼와 관람객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은데, 관객들의 히스테릭한 웃음소리와 열에 들뜬 듯한 눈빛은 무엇인가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광신도와 교주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특히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주문(Laugh Laugh Laugh)과 쇼가 끝날 때 함께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처럼 들리기도 한다. 



성공한 코미디언의 위치에 있을 때 헨리는 “심연을 동정해, 그래서 난 절대로 심연을 바라보지 않지.”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하지만 모든 사건이 벌어진 후 아네트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결국 자신이 심연에 굴복하고 말았음을 토로한다. 


“상상은 강력하고 이성의 노래는 약하고 가냘프다. 나는 절벽 끝에 서 있었지. 밑은 깊은 심연. 보지 않으려 했어, 떨쳐내려 했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밑을 보고 싶은 섬뜩한 충동, 반은 두렵고 반은 안심됐지. 눈을 돌려 심연을 봤어, 그 캄캄한 심연. 눈길을 주고픈 거대한 충동, 그 깊은 심연과 안개. 추락하고 싶은 간절한 동경.” 


헨리는 아네트에게 절대 심연을 보면 안 된다고 조언하지만, 심연은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다. 심연으로 추락하고자 하는 충동이 위험한 것이다. 니체는 심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 일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영화 내내 추락과 죽음에 대한 갈망이 반복된다. 헨리의 공연에는 항상 ‘죽음’이 등장한다. 코미디언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마이크 줄로 스스로를 목 조르거나 아내를 죽였다는 고백이 그것이다. 오페라 배우인 안도 극 중에서 반복해서 죽는다. 그녀의 죽음이 공연 안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공연 속 죽음의 자세와 동일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녀는 관객들을 대신하여 죽어주다가, 결국은 헨리를 대신하여 죽게 된다. 심연을 바라보고 추락하고 싶은 강력한 마음에 사로잡힌 헨리를 대신하여 안이 죽는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서 보이는 빨간 지그재그 선의 모습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튜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파수가 맞으면 잠시 소리가 들렸다가 맞지 않으면 없어진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를 지나 마침내 음악이 나오고 영화가 시작된다. 이처럼 멀리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이려면 주파수를 맞춰야 하고, 이 말은 사람 간에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서로의 주파수를 맞춰야 하는 것이다. 안과 헨리는 주파수가 맞았으나 결국 그들의 만남은 비극으로 끝나고, 헨리와 아네트는 서로의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서로의 노래에 화음을 맞추던 안과 헨리와는 달리, 헨리와 아네트는 각자 자신의 노래만을 부를 뿐이다. 



영화의 중반에 안이 죽고 후반부는 주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 ‘아네트’인 점과 감독이 자신의 딸 나타샤를 위해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는 부분에서 그들 부녀의 관계가 영화에 반영되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보게 된다.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직접 딸과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딸이 없었다면 만들지 않았을 영화라는 언급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아네트의 성장을 보여주는 영화인가? 엔딩에서 아네트가 마리오네트의 모습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을 아네트의 ‘성장’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조정하는 사람의 줄에 매달려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인형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했다는 점에서는 성장으로 볼 수 있지만, 외형만 달라졌을 뿐 헨리와 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네트의 모습은 진정한 성장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가 궁금해졌다. 더불어 로맨스에서 시작하여 호러/스릴러 장르를 넘나드는 이 영화를 나타샤는 어떻게 보았을지도 궁금해졌다. 어쩌면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한 편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일 수도 있겠지. “우린 세상을 만들었어. 너만을 위해”라는 오프닝의 노래 가사처럼. 그렇지만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다정한 부녀의 모습을 보여준 감독이 이 영화에 어떤 의미를 담았을 것이라고 희망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사랑하는 딸을 위한 특별한 메시지를 자꾸만 찾아보게 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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