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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Jun 06. 2022

도구가 된 종교

영화 [베네데타] 리뷰


개봉: 2021년

감독: 폴 버호벤

출연: 비르지니 에피라(베네데타), 다프네 파타키아(바르톨로메아), 

샬롯 램플링(펠리시타(원장수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폴 버호벤의 영화를 보고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베네데타는 어느 하나의 주제만으로도 말하기 조심스러운, 폭력, 성교, 종교, 이 세 가지가 모두 버무려져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충격에 사로잡혀 멍하게 있었지만, 이 영화에 어떤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한참을 망설이게 되었다. 결국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말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서 종교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영화는 수녀원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주인공인 베네데타도 수녀이며, 그녀의 모든 행동은 종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수녀원 속 수녀들은 몸의 편안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뻣뻣한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도 금지되어 있을 만큼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옷은 목 부분의 매듭 하나만 풀어내면 순식간에 나체가 될 수 있는 디자인이다. 인간의 욕망을 거친 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그 얇은 옷을 벗겨내는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인 것이다. 그 얇은 옷 속에 무엇이 있는지 영화를 보는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영화 속 종교는 더 이상 숭고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가리기 위한 얇은 커튼 정도로 자리하고 있다.   


어린 베네데타가 수녀원에 도착한 첫날, 기도 중에 갑자기 무너져 내린 성모 마리아 상에 깔리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성모 마리아 상은 왼쪽 가슴을 노출하고 있다. 그녀의 가슴은 왼팔에 안고 있는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로의 상징으로 나타나 있으나, 성모 마리아 상에 깔린 베네디타가 노출된 가슴을 입에 넣는 순간, 그 가슴은 더 이상 모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영화 속에 가슴이 등장한 또 다른 장면이 있다. 베네데타는 ‘뱀처럼 사악한 손길’로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한  ‘바르톨로메아’를 벌주기 위해 끓는 물에 손을 넣게 하고, 그 사실을 안 원장수녀의 지시로  노수녀의 방을 청소하게 되는데, 그때 그 수녀의 왼쪽 가슴에 생긴 흉한 상처를 보게 된다. 그 상처를 ‘나의 은밀한 애인’ 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방으로 돌아온 베네데타는 몰래 가져온 은쟁반에 비친 자신의 한쪽 가슴을 살펴본다. 함부로 옷을 벗을 수 없고, 벗은 몸을 남에게 보여 줄 수도 없으며,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도 금지된 수녀에게 몸은 잊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특히나 미혼의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수녀들에게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기능을 상실한 ‘가슴’은 어떤 의미일까?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야 하는 가슴이 지속적인 고통으로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킬 때, 그것은 수녀의 ‘은밀한 연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베네데타에게 가슴을 내어 주면서 모성을 상실하게 된 성모 마리아 상은 결국 남근의 대용품이 되면서 욕망의 도구가 된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물이 개인의 욕망을 위한 도구가 된 것이다. 신앙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실상은 권력을 휘두르고자 하는 욕망에 가득 찬 교황 대사와, 주교, 원장 수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남근이 된 성모 마리아상이 뜻하는 바처럼) 결국 종교가 그들의 욕망의 도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권력과 결합한 종교는 이미 그 의미가 퇴색하였으며, 모든 일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조작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베네데타의 ‘성흔’을 의심하였으나 그들의 필요에 따라 성녀로 추대하였다. 


영화 속 베네데타가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오로지 관객들에게만 제공될 뿐, 영화 속 배우들은 우리가 보는 그 환영을 볼 수 없다. 우리 눈에는 예수를 향해 달려가는 아름다운 순간으로 묘사된 장면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연극에서 죽음을 연기하는 베네데타가 우스꽝스럽게 발을 놀리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베네데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영화 속 다른 배우들이 베네데타를 향해 느끼는 감정에는 명확한 온도차가 존재한다. 베네데타가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들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공유된다. 기적의 순간을 함께 경험한 우리는 그녀가 진짜 성녀인지 아니면 그저 환영에 사로잡힌 미친 사람인지 헷갈려 하지만, 그녀의 환상을 보지 못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녀를 가짜로 성흔을 내고 성녀를 사칭하는 사기꾼으로 생각한다. 만약 베네데타가 정말로 사기꾼에 불과하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녀의 환상을 함께 보아야 했을까? 어째서 그녀의 환상은 우리 눈에 명확하게 제시되지만 그녀가 조작한 것으로 추측되는 성흔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피 묻은 유리조각’과 같이 간접적으로 제시될 뿐인 것일까?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위해 성모 마리아 상을 남근 대용품으로 사용하고, 성흔을 조작하면서까지 성녀가 되고자 했던 베네데타는 종교를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 또한 페사의 종교적 부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서로가 서로의 도구로 활용되는 그 모습은 어쩐지 성모 마리아 상 남근으로 성교하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연극에서 성모 마리아를 연기하고 주님의 신부(아내) 임을 늘 얘기하던 베네데타는 성모 마리아의 현신이며, 그 장면은 자기 자신과의 성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종교의 의미는 가장 원초적인 자기 위안의 방법 중 하나인 것일까? 감독은 이 영화는 신성 모독이 아니라 과거 역사의 재현이라고 주장하며, 영화 시작 부분에 굳이 ‘사실에 기반한 영화’ 임을 강조한다. 역시 폴 버호벤 감독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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