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해준은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 하는 사람이다. 그는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수시로 인공 눈물로 자신의 눈을 씻어낸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사람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 대상의 의지 또한 중요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드러내고, 숨기고 싶은 부분은 감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드러낸 모습뿐 아니라 이면에 숨은 모습까지 간파해 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보는 사람의 보고자 하는 의지와 보이는 사람의 의지가 만났을 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집 밖에서 잠복 수사를 하는 해준이 망원경으로 서래를 관찰할 때,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집안에 있는 서래가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소파에 엎드려 있을 때, 집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해준이 갑자기 그 자리에 나타나 떨어지는 담뱃재를 재떨이로 받아주는 장면은, 다음 씬에서 자동차 의자에 기대며 뒤로 눕는 해준의 모습으로 연결되면서, 그 장면이 마치 해준의 상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정말 그 장면이 해준의 상상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집 밖에만 있는 해준이 자신의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서래의 상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엎드려 있는 서래는 해준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슬며시 미소 짓고 있다. 아마도 그 장면을 보는 관객들 각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보는 사람에 따라 파란색 또는 초록색으로도 보이는 서래의 원피스처럼.
이 영화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또한 그 시선으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해준과 서래의 시선뿐 아니라, 사망한 기도수(서래의 첫 번째 남편)의 눈으로 그의 각막 위를 오르내리는 개미의 모습을 보게 되고, 어시장 좌판에 깔린 물고기의 시선으로 앞에 서 있는 정안과 해준의 모습을, 죽은 임 호신(서래의 두 번째 남편)의 시선으로 수영장 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서래의 모습을 본다.
때로는 뿌옇게 흐려진 시선(기도수)으로, 물속에 잠긴 것 같은 눈(물고기)으로, 심지어 죽은 자의 눈을 억지로 뜨게 만들어(임호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안개가 가득한 이포에서 화재 경보가 울려 대피한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것이 안개인지 아니면 진짜로 불이 나서 연기가 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결국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내 눈앞에 주어진 것, 그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준은 얇은 모래 한 겹으로 가려진 서래를 끝내 찾지 못한다. 바로 자신의 발밑에 있는 진실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불필요할 만큼 과도하게 주어지는 이런 시선들은 우리에게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내가 보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본다는 것 외에도 이 영화에서는 ‘지연되고 번역된 말’이 중요한 장치로 자리하고 있다. 한국어에 서툰 서래가 상황에 맞지 않게 선택한 단어(마침내, 단일한)나 번역기에 의해 오역된 단어(심장과 마음)는 그녀의 말과 상황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자막으로 즉각 표시되던 말들과 다르게 번역기를 통과한 말은 영상보다 한발 늦게 도착함으로써,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장면과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에 시간 차를 둘 수밖에 없고, 처음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뒤에 번역된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번역된 말이 주는 차이보다는 정안과 해준의 대화에 등장하던 이주임의 정체가 더 흥미로웠다. 정안의 말에서 이주임의 성별에 대한 암시는 전혀 없었는데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당연히 그가 여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경험에 빗대어 친한 여자 동료 간의 대화로 상상하고 듣던 내용들이, 대화의 상대방이 젊은 이혼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평범하게 들렸던 그들의 대화가 실은 기혼 남녀 간의 묘한 대화로 변경되었다. 제대로 듣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깊은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로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해준은 늘 선명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오히려 더 날카롭고 선명하게 보는 것은 정안이다. 주말에 이포로 내려온 해준의 냄새를 맡던 정안은 그의 등을 때리며 “폈네, 폈어”라고 말을 한다. 냄새를 맡는 동작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담배를 피웠는지 의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바로 그전에 서래에게 볶음밥을 해 주는 해준의 모습을 본 우리는 그 말에서 “(바람을) 폈네”라는 말을 떠올릴 수도 있다. 사실 해준은 바람은 피우고 있었지만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안은 모든 것을 숫자(확률)로 계산한다. 중년 남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 주말부부가 이혼할 확률, 결국 그녀는 해준이 붕괴되었음을 알아차리고 그가 가진 비밀을 간파하였으며,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건들(석류와 자라)만 챙겨서 산뜻하게 (연하의 이혼남과 함께)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바닷가 장면은 아주 공들여 찍은 장면임이 분명하다. 차를 타고 도망치는 서래의 위치는 핸드폰에 설치된 위치 추적 장치로 인해 해준의 폰에 해준의 위치와 함께 표시된다. 해준의 휴대폰 속 서래의 위치는 해준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이며 그들은 같은 길을 달리고 있다. 서래가 나뭇가지로 미리 표시해둔 위치에 가서 정해진 시간이 되었는지 확인한 후 땅을 파낸다. 마침내 땅 파기가 완료된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 사선 방향으로 비행기가 한대 지나가고, 그 비행기는 서래의 휴대폰 속 음성파일을 확인하는 해준의 머리 위로도 같은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다. 그들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바다 위로 점점 내려앉는 태양의 위치까지 소소한 모든 것들이 그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서래의 마지막 모습은 그저 암시적으로 표시되었을 뿐 그녀의 죽음의 순간은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서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서래가 동정과 애정을 담아 밥을 챙겨주는 고양이. 그 고양이는 서래에게 선물로 까마귀를 잡아 주고, 서래는 죽은 까마귀를 묻어주기 위해서 양동이로 흙을 퍼낸다. 그 양동이는 바닷가에서 자신이 누울 자리를 퍼내기 위해 다시 등장한다. 죽은 까마귀가 고양이의 애정표현이었던 것처럼 서래는 해준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물로 준비한 것이다.
서래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손쉬운 방법 대신, 모래사장에 스스로를 묻는 방법을 택한 것은 왜일까. 안개가 많은 이포에서는 앞을 선명하게 보기 힘들다. 습기가 많아서 침실 천장에 곰팡이가 슬기도 한다. 해준이 누운 침대 위에 보이는 곰팡이를 보면서 서래와 곰팡이의 공통점을 떠올려 보았다. 공기 중에 떠돌아다녀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딱 맞아떨어지는 조건을 만나면 슬금슬금 퍼져 시작해 어느새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한번 자리를 잡으면 깨끗하게 없애려고 해도 쉽지 않고 기어이 흔적을 남긴다. 없어진 줄 알았다가도 조건이 맞으면 어느새 다시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준의 마음속 서래처럼.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결혼을 했다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해준을 다시 만나기 위해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스스로를 매장한 것이다. 해준이 보지 못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제는 바닷가 모래사장 위를 걸을 때, 밀물이 밀려 들어올 때, 그 아래 무엇이 있을지 나는 궁금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