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쟈 Oct 08. 2022

페르소나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 리뷰


개봉: 2022년

감독: 미아 한센-러브

출연: 빅키 크리엡스(크리스), 팀 로스(토니), 미아 와시코브스카(에이미), 앤더스 다니엘슨 리(조지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에서 내려 자동차로 1시간 48분,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먼 여정이다. 커플로 보이는 크리스와 토니가 먼길을 거쳐서 도착한 곳은 영화감독 ‘베르히만’이 살았고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포뢰섬이다. 영화감독인 둘은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잠시간 베르히만이 살았던 집을 빌리게 된다. 긴 여정에서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여서도 둘의 모습은 상반되어 보인다. 별 걱정 없고 느긋해 보이는 토니와 달리 크리스는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다. 기대보다 훨씬 좋은 집과 자연환경, 그리고 지나는 길에 보이는 사소한 풍경 하나하나마저 베르히만의 영화에 등장한 의미가 있는 공간들이다. 마치 어떤 예술가의 거대한 예술작품 속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공간들은 크리스를 숨 막히게 하지만, 토니에게는 그저 마음이 놓이는 편안한 환경으로 느껴질 뿐이다. 






영화 속 크리스는 베르히만을 좋아하는 여성 영화감독이며 그녀의 파트너인 토니 또한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크리스는 이 영화의 감독인 미아 한센-러브와 많은 부분이 겹쳐진다. 영화를 보면서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크리스의 모습이 마치 미아 감독의 모습처럼 보이게 되는 지점이다. 영화 전반부는 포뢰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베르히만의 삶에 대해 주로 이야기된다. 영화 후반부에는 크리스가 만든 시나리오를 토니에게 설명하는 현실의 대화를 기반으로 한 상상의 장면들이 나오는데, 어느 순간 크리스의 시나리오 속 주인공 에이미가 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처럼 보인다. 크리스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길 위로 에이미도 역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크리스가 방문했던 해변을 에이미도 역시 방문하면서 크리스의 기억이 에이미의 기억으로 덮인다.  





크리스가 만든 시나리오 속 에이미 역시, 감독인 크리스를 반영한 인물로 보인다. 에이미는 영화 속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아이가 있으며 결혼은 하지 않은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전 애인인 조지프와의 대화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녀 또한 영화감독이며, 베르히만을 좋아한다. 이렇게 보면 미아 감독을 닮은 크리스와 그런 크리스를 닮은 에이미는 모두 한 몸에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딸 준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크리스와 헤어진 전 애인을 만나서 아이는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에이미는 비슷한 듯 다른 모습이다. 앞서 말했듯이 크리스가 만든 시나리오 속 에이미의 모습 또한 미아 감독이 창작한 인물임을 고려하면, 크리스와 에이미는 감독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이다.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두 여성의 선택을 통해서 미아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나리오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크리스에게 토니는 ‘페르소나’ 같은 작품은 기대하지 않는다며,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쉽게 말을 건네지만, 미아 감독은 자신의 두 얼굴인 크리스와 에이미를 만들었고, 크리스는 영화 말미에 에이미의 옷을 입고 그녀가 만들어낸 영화 속 세계로 들어간다. 전혀 다른 존재로 보였던 크리스와 에이미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간에 존재하며, 같은 남자와 애정을 주고받는다는 면에서 어쩌면  베르히만의 영화 ‘페르소나’ 속 여주인공들처럼 결국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두 개의 얼굴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 속 영화가 영화 속 현실과 맞닿는 지점이다. 시나리오의 마지막 부분, 자신을 두고 떠난 조지프를 그리워하며 울며 잠들었던 에이미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크리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에이미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간에서 깨어난 크리스를 보며, 나는 그녀가 영화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크리스는 바닷가에 있는 베르히만의 작업실에 방문하고, 그곳에서 앞서 함께 섬 투어를 했던 함푸스를 만나는 순간 이제 시나리오 속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크리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함푸스는 크리스에게 집필 진행 상황을 묻고 크리스는 아직 결말을 쓰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작업실에서 잠들었던 크리스가 마치 마법이 끝나는 신호처럼 울리는 시계 종소리에 잠에서 깬다. 눈을 뜬 크리스의 시선에는 마치 유령처럼 조지프의 모습이 나타난다. 상상 속 인물이 어떻게 현실에 등장한 것인지 잠시 어리둥절한 상황에 빠져 있던 나는 영화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보고, 상상의 장면들이 실은 크리스가 촬영한 영화 속 장면이었다고 납득하게 되었다.



모두가 돌아간 마지막 날 밤. 크리스와 앤더스(조지프)는 늦은 시간까지 함께 게임을 하며 술을 마신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눈빛과 아쉬운 듯 조심스럽게 맞잡은 손은 그냥 감독과 배우라는 느낌으로 설명하기에는 묘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크리스가 만든 영화 속 에이미와 조지프의 관계가 단순히 상상 속의 일만은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먼저 손을 빼는 것은 앤더스이다. 에이미와 조지프의 관계에서 에이미를 두고 떠난 것이 조지프였던 것과 같이.




영화 속 현실과 상상이 절묘하게 뒤섞인 장면들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크리스의 시나리오 속 이야기인지 궁금해진다. 감독은 현실 속 이야기를 상상 속 이야기와 교묘하게 접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낸 후, 상상 속 이야기를 다시 현실화하고 있다. 그 연결 부분이 어찌나 매끄럽던지 영화 속 베르히만 투어 장면에서 나왔던 담벼락이 떠올랐다. 투어 가이드가 영화 촬영을 위해 담을 허물었다가 다시 쌓았다고 설명했는데, 다른 돌을 이용했기 때문에 표시가 난다고 말하지만, 내 눈에는 연결 부분이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분명 다른 재료로 쌓아 올렸을 텐데, 쌓아둔 돌이 원래 가지고 있던 모양을 최대한 살려서 연결시켰기 때문인지 어색함이 없었다. 

결이 서로 다른 이야기로 쌓아 올린 이 영화가 잘 맞물려 아름답게 하나가 된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양이 남긴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