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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Apr 07. 2023

달은 우리의 이웃

[영화 가가린 리뷰]




개봉: 2020년

감독: 파니 리에타르, 제레미 트로윌

출연: 알세니 바틸리(유리), 리나 쿠드리(다이애나), 피느간 올드필스(달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 세계의 우상이었던 ‘유리 가가린’ 의 이름을 본떠 지은 가가린 주택단지는 한때는 젊은 신혼부부의 꿈과 사랑을 담은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낡고 허물어져가는 폐허에 가깝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공간인 그곳이 ‘유리’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하나뿐인 안식처이다.  



영화 인트로 장면에서 우리는 건물의 옆면을 통과해 나오는 태양의 일출 장면을 볼 수 있으며, 이 주택단지를 비추는 카메라는 마치 중력을 잃은 것처럼 부드럽게 유영한다. 마치 우주에서 행성을 촬영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들은 가가린 주택단지가 여러 명이 함께 거주하는 공동주택 단지라는 점에서 같은 행성에서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석면으로 오염되고 쓰레기와 쥐가 들끓는 가가린 주택단지는 마치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앞두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가가린 주택단지를 행성이라고 한다면 파괴될 예정인 이 행성을 지키는 것이 ‘유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유리’는 수선하는 사람이면서 관찰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리에 매몰되지 않고 주변을 관찰한다. 그는 돈을 모아 고물상에서 부품을 구입하고 꺼진 전등을 교체하고 건물 외벽을 밝게 페인트칠한다. 또한 개기 일식이 있는 날 그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한다. 그러나 달이 태양을 가린 그 순간 가가린 주택단지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그곳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노력은 건물의 노후화와 배관 문제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며, 멀쩡하게 수리된 전등도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불합격이다. 결국 철거가 결정되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그곳을 떠나는데, 갈 곳이 없는 유리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자신만의 우주선을 만들게 된다. 




그가 만든 우주선은 ‘유리 가가린’의 우주선이 그랬던 것처럼 자체적으로 식수를 생성하고, 온도, 습도, 공기 등이 맞춤으로 갖추어진 온실이 있으며, ‘유리’는 그의 우주선 내의 방과 방 사이를 흐르듯이 이동한다. 그러나 잠시간의 안온한 시간이 끝나고 주택단지는 대대적인 철거의 단계로 진행된다. 우주선은 원래 지구를 떠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유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건물을 폭파시키는 날 밤, 주택단지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들고, 어둠을 밝히기 위해 손에 든 핸드폰의 조명을 밝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처럼 보인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 흩어져 있는 별들이 대폭발 전,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것처럼, 가가린 주택단지의 마지막 폭발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애초에 가가린이라는 하나의 장소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가가린의 폭발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사람들이 가가린이라는 행성의 주위에 떠 있는 별처럼 보인다. 







 건물을 폭파시키기 위한 카운트다운은 결국 유리가 만든 우주선의 출발을 위한 카운트다운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우주선은 지구라는 행성을 떠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우주선의 소명은 우주를 비행하고 나서 다시 지구로 귀환하는 것까지이다. 그러나 유리가 만든 우주선의 목적은 귀환이라기보다는 탈출에 가깝다. 돌아올 곳이 없는 유리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우주선을 타고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우주선 속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우주선 문을 발로 차고 아예 우주로 나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 우주선과의 연결 줄 없이 우주를 떠돈다는 것은 되돌아올 방법이 없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다이애나’라는 구명줄이 있었다. 다이애나에 의해 중력을 잃고 떠돌던 유리가 마침내 지구에 안착한다. 바닥에 누워 자신이 만들어낸 SOS 불빛을 보며 안심한 듯 미소 짓는 유리의 모습은 구조된 자의 안도감이다. 







유리가 끝까지 그곳에 남아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갑작스럽게 퇴거가 결정되어 떠나는 한 주민이 “집은 뺏겨도 우편함까지는 못 뺏겨”라며, 건물 1층에 설치되어 있던 자신의 우편함을 뜯어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건물이 붕괴되어 사라지더라도 자신의 이름 혹은 동호수가 적힌 우편함은 간직하고 싶었나 보다. 그 우편함을 통해 받았던 편지들이 바로 그곳에서의 추억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아이들이 자라온 세월의 키만큼 높아져가는 벽면의 눈금은 사라지더라도,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의 유년 시절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엄마 없이 혼자 사는 유리를 살뜰하게 챙겨주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떠나는 날, 그의 차를 운전하는 유리의 얼굴 위로, 차 창문에 비친 가가린 주택단지의 그림자는 유리의 전신을 꽉 채웠다. 달은 우리의 이웃이며, 달과 지구는 서로를 끈끈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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