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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Jul 05. 2022

피아노 명곡집

눅눅한 추억의 냄새

 

     서가에 있는 몇 권의 악보집 중에는 모 출판사의 '피아노 명곡집'이라는 악보집이 있다.  새로 산 깨끗한 악보집, 아이들의 학교와 피아노 교습에 사용하는 클리어 파일철, 출력된 낯장 묶음파일철들과 뒤섞여 묵묵히 숨어 있다. 눈에 띄지도 않는다. 다른 악보를 꺼내면서 얼핏 보곤 했지만 무심히 지나치던 그 책은 깔끔하고 매끈한 주변 책들과 비교되리만치 위아래가 헤어져 종이가 나풀거리는 왜소한 존재감만 드러낼 뿐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정말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책과 함께하는 즐거운 기억도, 슬픈 사연도 없지만 둘 만이 알고 있는 추억을 간직한 채로 서로를 무심히 바라보곤 한다.


     피아노는 형이 먼저 배웠다. 진도는 나보다 훨씬 앞서서 체르니 40번을 달렸던 것 같다. 그때 함께 들고 온 악보집이고 원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형님 것이었으니 나는 저 책을 교재로 쓸 만큼의 실력을 갖추진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거금을 들여 집 안에 피아노 한 대도 들여놓았고 그걸 뚱땅뚱땅 거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학업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마니아적 직관과 정보력은 항상 나보다 넓었으니 형의 그림자를 쫓아다니기만 해도 새로운 장르를 접하고 유명 뮤지션의 음악을 듣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난 형의 그림자 뒤에서 거저 얻어 먹고 다니는 것은 어릴 적부터 타고난 것 같다. 그런데 피아노 학원을 다닌 기간도 나보다 길었지만 어쩐지 형의 피아노 소리는 기억이 나질 않는 건 아쉽다. 사진 속에서 피아노를 치는 옆에 나란히 앉은 나의 모습은 형을 귀찮게 방해하는 개구쟁이 마왕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 사진 속 어디엔가 분명 피아노 명곡집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호기심에 책을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절판된 서적이 아니라 지금도 온라인 서점에서, 심지어 상위에 노출되어 있고 무려 30년 이상을 찍어내고 있으니 실로 숨은 스테디셀러 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의 악보를 펼쳐보던 어린아이는 그중에서 단 한 곡도 칠 수 없을 만큼 어렵다는 걸 알고 정신이 어질어질했을 뿐이고 첫 곡인 '엘리제를 위하여'가 유일하게 흉내 낼 수 있는 곡일 뿐이며 그것도 2 주제로 넘어가기 전 귀에 익은 앞 소절 몇 마디의 선율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그 부분만이라도 가족들에게 잔뜩 손가락에 힘 들여가며 자랑스럽게 연주하면서 비싼 피아노를 들이고 학원을 보낸 보람이 있구나 하는 시선을 느끼면서 연주하곤 했었다. 나에게는 그런 책을 가지고 다는 형, 학원의 누나들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굉장함은 지금 우리 아이들이 유튜브로 인싸들의 동영상을 보는 느낌의 아날로그 버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기억들이 아마도 피아노에 대한 동경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


     바로 그 책이 여전히 내 옆에서 무려 35년을 함께 하고 있다. 그 당시 집에 있었던 물건 중 어느 또 다른 물건이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쉽게 떠오르는 건 없다. 정말 유일한 것이라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지방에서 서울로 장거리 이동을 포함하여 6번의 이사를 했음에도 살아 남아 있는 것이다. 피아노 의자 속에 빨간 피아노 커버, 건반 클리너 등과 함께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잡동사니와 함께 있었다가 그 피아노가 팔려 나갈 때도 그 악보집만은 건져 내었다. 피아노가 없는데도 서울 집에서는 십 수 년을 홀로 버티기도 했는데 그 사이 어디에 숨어 있었다가 다시 나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피아노를 다시 하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었던 시절인데도 그 책은 종이로 분리수거되지도 않고 내 손으로 거두어 용케도 다시 책상으로 옮겨졌다. 궁금하다. 그렇게 이 녀석을 살아남게 한 건 음악에 대한 꿈, 언젠가 다시 불을 지펴보겠다는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지나간 과거, 그 책을 사주신 어머니의 손 길이 묻어있을 거라는 노스탤지어였을까.


     빛바랜 누런 종이, 나풀거리는 모서리의 종이 실밥이 그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이제는 더듬더듬 초견을 해 볼 수 있는 곡이 몇 개 생겼지만 여전히 어려운 작품들도 많다. 체르니 30번 후반 연습과 병행하는 작품집이라는 부재로 그 수준을 대충 짐작해 보면 되겠다. 항상 쇼팽, 모차르트 등 귀에 익숙한 유명 작곡가의 작품만 찾아보곤 하는 나의 레퍼토리 선곡 취향이 있으니 명곡집의 곡들에 조금 낯설다. 하지만 이제 다시 살펴보니 여러 작곡가의 숨겨진 짧지만 깊이 있는 작품들을 골고루 접할 수 있게 해 주는 최고의 작품집이라 듬뿍 칭찬해 주고 싶다. 아이러니하게 똑같은 책을 처가집 작은 방에서 찾아내었다. 그래, 그 시절 이만한 책도 없었으니 피아노좀 친다 싶으면 한 권씩 필수품으로 가지고 있는 책임이 분명하다. 아내도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었고 분명 그 책을 샀지만 아직도 집에 있는 줄 몰랐다며 그걸 용케 찾아낸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다. 형의 추억은 내가 간직하고 있고, 아내가 잃어버린 기억은 내가 찾았다. 아직 형과 아내에게 피아노에 대한 꿈이 남아 있다면 이제는 내가 대신 기억해주고, 내가 대신 연주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설령 그 책이 사라져 버리더라도 내 기억 속에 있는 책과 함께 했던 추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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