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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Feb 03. 2024

시대의 소음

살아남기 만렙

    오늘 밤에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들을 기다린다. 어제 그 사이렌 소리가 아직까지는 울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결코 게을러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친척들이, 내 친구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잠옷 바람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나는 옷을 차려입고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수갑에 어서 내 손목을 내어주고 싶다.


    스탈린은 공연 도중에 자리를 떠났고, 소련의 일간지 <프라우다>는 이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천재는 그의 음악 여정이 여기서 끝이 났고, 죽음이 턱 밑까지 왔음을 직감했다. 수 백명의 예술가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걸 보고 들었으니 최소한 그런 정도는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같은 <프라우다>에서는 애국심에 넘쳐 메트로폴로탄 오페라의 미국 초연을 보도했고, 이제 똑같은 그 신문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소련 밖에서 성공한 것은 단지 '비정치적이며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그 작품이 '부산스럽고 신경과민적인 음악으로 부르주아들의 비뚤어진 취향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일 뿐이라고 읊어 댔다.


[본 브런치에 색 텍스트는 '시대의 소음' (다산책방)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권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무엇을 잘못했냐는 질문 그 자체가 불경스럽고 충성스럽지 못한, 속된 말로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한 벌레만도 못한 존재임을 증명할 뿐이다. 투하쳅스 대원수가 스탈린 동무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서신도 효염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지난 2년간 변함없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칭찬하던 비평가들이 갑자기 그 작품에는 단 한 가지도 장점이 없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프라우다> 덕분에 눈에 씌었던 콩꺼풀이 벗겨졌다면서 솔직하게 이전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아마도 과오를 인정하지 않은 비평가들은 이미 다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팩트: <프라우다>의 사설은 오페라가 공연되고 이틀 후 올라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지난 2년 동안 소련의 자부심 중 하나로 성황리에 공연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조차도 이미 봤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게 열흘 동안 밤새 그 승강기 앞자리를 지켰다. 그건 공포였다. "늑대는 양의 공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사이렌이 울리고 문이 쾅 여닫히는 소리와 복도를 따라 걷는 발자국 소리를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은 점점 그의 편으로 다가왔다. 이제 옷은 차려입되 여행 가방을 놓아둔 채 아내 곁에 누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마침내 가방을 열고 안에 들어 있던 속옷이며 치약, 칫솔을 하나씩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무서운 사람들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시간은 흘렀고, 당분간 그는 살아남을 운명임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그해 여름 작곡한 교향곡 5번이 초연되었고 대성공이었고 그렇게 그는 확실하게 살아났다. 아마도 그는 사활을 걸었으리라. 그리고 눈치 빠른 비평가들은 극찬을 했을 것이다.  


     음악은 정치를 모른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과 음악을 듣는 사람이 정치적일 뿐이다. 하지만 정치는 음악이 필요하다. 인민을 선동하고 정치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미디어와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하지만 매 순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는 인간에게 중립은 있을 수 없고 한 없이 순수한 음악 앞에 가여운 존재로 보인다. 정부의 입맛에 맞게 음악을 생산해 내는 기계가 될 수도 있고 그것 또한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조차도 철저히 억압되어 있는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승리일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인간승리를 하였다. 아니 어쩌면 잠시 미쳐있었을 수도 있겠다.



    세상은 온통 광기뿐이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할까? 소련 음악가의 대표로 미국땅을 밟는 건 영광일 수 있겠지만 감시와 통제 속에서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누구도 공식적으로 구속하지 않았고 개인의 충성만으로 사회는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예술가를 포함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더 이상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위장을 한다. 유대 민속음악에서는 절망을 춤으로 위장한다. 그래서 진실의 위장은 아이러니였다. 독재자의 귀는 아이러니를 알아듣도록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들이 권력층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저항의 도구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도구는 나를 지키고, 나의 가족을 지키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다만 양심과의 싸움은 치열할 것이며 승리하였는지, 철저히 패배하였는지는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 삶의 무게가 또 한 번 느껴진다.  


    아이러니가 그의 음악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질문은 위험했다. 가히 도발적이다. 음악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높은 자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아이러니가 자식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음악으로 위장하여 높은 곳을 향해 소리칠 수는 있겠지만 보다 우리는 직설적인 걸 원한다. 설령 그게 나를 영원히 보호해 줄 수 없을지라도 그게 바로 양심이 원하는 것이라면 갈등은 시작된다. 숨이 턱 막히는 갈등.


    좋은 음악은 언제나 좋은 음악이고, 위대한 음악은 아무도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흐 서곡과 푸가를 어떤 박자, 어떤 세기로 연주하더라도 여전히 위대한 음악이었고 그것은 건반악기에 전혀 재능이 없는 비열한 인간에게조차 맞설 수 있는 증거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런 음악을 냉소적으로 연주할 수는 없다.


    권력층의 압력을 받다 보면 자아는 금이 가고 쪼개진다.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는 영웅으로 살아간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더 흔한 경우는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도 겁쟁이로 산다. / 그러나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영웅이 되려면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되었다 - 총을 꺼내고, 폭탄을 던지고, 기폭 자이를 누르고, 독재자를 없애고, 더불어 자기 자신도 없애는 그 순간 동안만. 그러나 겁쟁이는 한순간도 쉴 수가 없었다.




    소설인가 픽션인가. 소설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인간 드리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어디서 태어나고 언제 태어났는지를 선택할 수 없다는 건 운명일 테다. 스탈린 독재체제에서 전쟁과 사상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속에서 운명을 거스르려는 한 인간의 생존 본능과 양심과의 병적인 고뇌를 그려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데 왜 자신만이 살아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그것 조차도 피를 말리는 감옥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러한 그의 삶을 알지 못하면 그의 음악을 알 수 없다. 수많은 작품 속에 들어가 있는 한음 한음이 결국 그의 땀과 피와 공포, 불안함, 절망, 자괴, 비참 그리고 저항과 작은 희망과 환희를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1936년, 1948년, 1960년 윤년마다 악운이 찾아왔지만 나는 살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윤년 1972년에 이제 나는 자신의 운명이 다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운명은 더 가혹한 악운을 씌우고 달아나버렸다. 나를 그대로 살려둔 것이다. 계속 사는 것. 삶은 앵무새 꼬리를 잡고 계단을 질질 끌고 내려가는 고양이였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 때마다 그의 머리가 부딪쳐 쿵쿵 튀어 올랐다.


쇼스타코비치는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음악이 그를 살렸고, 그의 음악은 지금도 살아있다.


 



드리트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 ~ 1975),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작곡가. 졸업작품으로 교향곡 1번을 작곡하였고 작품성을 평가받으며 10대 소년이 작곡한 교향곡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소련의 천재 음악가로 명성을 날린다.


   작품의 만족도에 따라 조국에 대한 충성을 판단하는 독재시대에 작곡가들은 목숨을 걸고 작곡하고 초연을 하였으리라. 이런 서슬 퍼런 시대에서 5번 교향곡의 성공은 그의 목숨을 부지해 주었다는 또 다른 타이틀로 유명하다.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전쟁 중에 초연된 곡이라는 배경 때문에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의를 불태우는 곡으로 들리지만 사실 전쟁 전에 작품이 구상되었다는 점과 훗날 그의 비망록 등을 종합해 보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 정말 전쟁의 승리를 부르기 위한 것이었는지 그 속은 쇼스타코비치 본인만 알고 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어쩌면 정치의 풍파 속에서 목숨을 겨우 부지했던 자신을 통해 배운 것이라면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통해 그의 음악을 처음 접했다. 분명 고전, 낭만 시절과 다른 분위기로 시작하여 긴장감 있는 도입과 저 멀리 연기라도 피어오르는 듯한 적막감이 묘하게 낭만적으로도 느껴졌다. 반복적인 선율과 점점 넓게 물들어가며 무르익는 강렬한 선율은 분명 대중성도 만족시켜 주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선율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장감과 대곡 구성은 그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내 안에서 다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작은북 연주자 손목이 살아남아있나는 생각도 하면서...) 작곡가 및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순수히 그 자체의 매력만으로 우연히 귀에 들어온 음악만큼 강렬하게 인상을 받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레닌그라드도 마찬가지였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던 당시였고 이게 전쟁통에 작곡되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연주자들을 어렵게 모아 적군에 포위된 땅에서 초연되었다는 사실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런 반전의 충격은 더욱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여전히 애청하는 곡 목록에 올리고 있다. 이제 그와 그의 작품 레닌그라드에 대해 조금 알고 나니 적막감과 목가적인 분위기는 처량함과 간절함, 때로는 저항으로 바뀌어 간다.


*레닌그라드 = 레닌의 땅. 본 지명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한 동안 그렇게 불렸다가 1991년 다시 본명으로 복원 


   또 다른 유명한 곡으로 왈츠 2번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Suite for Variety Orchestra)의 왈츠 2번>이 이 있다. 설사 누가 작곡하였는지는 모르더라도 첫 소절만 들어도 아~ 이 곡!이라고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이미 여러 영화음악으로도 선보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쿵 짝짝 쿵 짝짝하는 반주 리듬이 절로 흥겨움을 불러일으키면서 춤을 추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공간은 한 껏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그런데 반복해서,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어쩐지 조금 슬픈 감정도 느껴진다. 단지 단조곡이라서? 화려한 기교 없이 한 껏 뻗어나가지 못하고 공간은 닫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곡이 작곡된 시기는 1956년으로 스탈린이 사망하고(1953년) 권력자의 그늘에 움츠러들지 않은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작곡되었으니 과거 서슬 퍼런 시대적 배경과 연결 짓는 건 모순일 것이다.  


    피아노 악보도 여러 버전이 있지만 주 선율은 반복된다. 그리고 얼마든지 반복해서 연주할 수도 있다. 4분 음표 170으로 조금 빠른 속도가 분명 흥겨움을 주지만, 느리게 연주하면 느린 대로 감미롭기도 하면서 묘하게 어두운 분위기를 쫓아가며 음악을 즐겨볼 수 있다.  

  

Waltz no.2 흥겨운 듯하면서도 서글픈 감정이 매력적인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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