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 쓰기
'다시, 피아노'를 몇 년 만에 다시 읽고 다시, 피아노를 해보자는 생각보다 다시 책을 써보자는 생각으로 머리를 흔들어 놓고 가버렸다. 그래도 가슴속에는 여전히 피아노가 있다. 머리와 가슴이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얼쑤!
베개로 쓰기는 살짝 부족한 575페이지의 책이다.
영국 가디언지의 편집국장 앨런 러스브리저(Alan rusbridger)가 쇼팽 발라드 1번 (Op. 23)을 완주해 내기 위한 18개월간의 도전기를 기록한 글로 피아노에 대한 열정과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함께 버무려진 글이다. (2016년 당시나이 57) 물론 핵심은 피아노에 맞춰져 있지만 분량의 3할은 유력언론사 편집국장의 일상이 하루 24시간으로도 부족할 만큼 얼마나 바쁜 것인지를 헤아려보는 재미도 함께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피아노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읽든 치열한 언론인의 생활을 엿보고 싶은 사람이 읽든 어느 쪽이든 흡족함을 줄 만한 책으로 추천해주고 싶다.
유력 언론사의 편집국장의 지위 특성상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포함한 유명 인사들과 나눈 대화를 옅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본인이 도전하고 있는 발라드 1번에 대한 피아니스트들의 견해도 들을 수 있다. 리처드 구드, 스티븐 허프, 이매뉴얼 액스, 다니엘 바렌보임, 우치다 미츠코 등이 그들이다. 엄청난 도전, 악마 같은 도약과 변조, 전문 피아니스트도 정확한 연주가 불가능한... 등 발라드 1번에 대한 미사여구와 난이도에 대한 평가는 모두가 비슷비슷했다
353p, (바렌보임, 발라드를 처음 친 나이)
"열세 살 아니면 열네 살 때쯤이었습니다."
"10대라면 누구나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곡인가 봅니다?"
"그러게요. 어른이 되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곡인데 말이죠!"
어느 피아니스트가 '그건 어렵지 않은 곡입니다'라고 인터뷰했었다면 과연 이 책에 실릴 수 있었을까 하는 약간의 의심도 있긴 하지만 헨레 난이도가 괜히 8 은 아닐 것이다. 전공자를 다루는 수준의 레스너와 함께 했다는 점에서 당신과 나의 출발선상이 같지는 않다는 것을 느끼니 흠... 동질감이 슬슬 이질감으로 바뀌게 된 점은 독자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다. 그렇기에 혹 어느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다시, 피아노"를 하는데 자신감을 얻고자 했다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는 점을 미리 얘기해두고 싶다.
경쟁 유력 언론사의 폐간, 위키리스크의 문건 폭로, 누군가는 죽고 사는 문제로 촌각을 다투는 얘기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발라드 1번으로 점프할 때를 보면 일과 여가의 구분이 이처럼 확실할 뿐만 아니라 이토록 초연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데 악보가 보여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피아노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곤 하였나 보다.
459p, 48시간 전만 해도 전 국민이 읽는 신문의 책임자로서 우리 시대의 가장 거대한 국제적 미디어 스캔들이라는 격랑을 헤쳐나가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여덟 명의 관객을 두고도 잔뜩 긴장한 나머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단 말이다.
간간히 스테인웨이(Steinway), 파치올리(FAZIOLI, ITALY)에 관한 피아노이야기. (파치올리는 스테인웨이 마이스터들이 독립해 만든 회사로 높은 완성도 덕분에 때론 스테인웨이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고 한다.)그리고 부록으로 들어있는 핑거링과 연습 노트 기록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발라드 1번 악보도 함께 볼 수 있는 점도 흥밋거리이다.
디지털 피아노에 대해, 그리고 전문 연주자가 생각하는 핑거링이란 무엇인지 감탄하게 만드는 명언 같은 글귀도 마음에 와닿는다. 그래서 업라이트를 다시 장만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107p, "주로 디지털 피아노로 연습을 했거든요. 그런데 디지털 피아노라는 게 음량을 줄일 수 있는 기계다 보니 실제 실력 이상으로 연주가 괜찮게 들리는 착각에 빠지더란 말이죠." 악기 자체도 기만적이긴 했지만, 그보다도 본인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게리'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거죠. (앨런에게 발라드 1번을 도전하게 만든 모임 일원인 '게리')
208p, "여기요, 저라면 이런 맥락에서 절대로 엄지와 중지를 쓰지 않겠어요. 반드시 그게 옳지 않은 방법이라는 건 아니에요. 사실 1과 3을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다만 엄지와 중지는 가장 힘이 센 손가락이기 때문에 특히 음색이 아주 밝은 피아노라면 더더욱 피해야 할 핑거링이죠. 선율을 부드럽게 풀어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5와 2로 치는 게 적당하겠네요." (피아니스트 로런과의 인터뷰에서)
자, 이제 책은 덮어두고 잠깐 열정과 재능 얘기해 보고 마무리하고 싶다. 열정과 재능이 하이파이브를 하면 그 인생은 자연스레 성공의 길을 보장한다. 사실 이 말도 조심스럽다. 열정은 내 안에서 나오고 재능은 밖에서 들려오는 얘기가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것만 찾지 말고 내가 잘한다는 것에 귀담아 들어야 하겠지만 내면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인 것이다. 그 일을 내가 취미로 할 것인지, 직업으로 할 것인가는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그렇다 하여 결코 내면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평생! 그래서 삶이 따분해질수록, 혹은 힘든 일이 있을수록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렇게 어릴 적 품어왔던 동경의 대상으로 마음이 가는 듯하다.
허나,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은 재능과 열정은 나의 꿈과 연결된 단어가 아니라 생존과 연결된 단어가 되어 버린다. 재능은 있으나 열정이 없었던 적 혹은 2% 못 미쳤던 적이 있었기에 그 순간들을 아쉬워하며 뒤돌아보게 만들었던 적은 없었을까? 일을 하다 보면 힘에 부칠 때가 있다. 재능이 없는 것일까? 열정이 없는 것일까? 재능은 직업으로, 열정은 취미생활로. 둘이 하이파이브를 하기에 늦었다면 하던 길로 계속 나아가되 좋아하는 것도 이제 하나씩 걸러내어 하나에 집중해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 좋아하는 관심사의 범위도 줄여나가고, 음악의 장르도 좁혀나가고, 취미생활도 남은 여생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선별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과 아쉽지만 다음 생으로 넘겨야 할 것을 발라내는 게 더 풍요로운 삶이 될 듯하다. (ㅓㅜㅑ... 너무 쓸데없이 비장한데?)
조성진 Chopin Ballade No.1 in G Minor, Opus 23 (Live from Yellow Lounge)
https://youtu.be/taY5oHleS4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