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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Jul 18. 2022

청각과민

예민했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혹시 타고난 걸까?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크리스텔 프티콜랭>에서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 뇌의 주목할 특징이 감각 과민증이라고 한다. 유난히 예민한 오감을 지닌 경우를 지칭하는 학술 용어이다. 감각이 예민해서 들어오는 정보가 많으니 생각도 많아진 경우로 보인다. 책을 통해서 다섯 가지 감각 과민을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인 상보다 세부적인 요소와 빛에 민감한 시각과민

여러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고 흘려듣지 못하는 청각과민

분위기나 촉감 등의 정보를 포착하는 운동감각과민

동물적이고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후각과민

혀끝의 미세한 차이도 구분해내어 식도락가가 많은 미각과민


    누구나 하나쯤 감각과민을 가지고 있다는데 나는 어느 쪽일까. 다른 그림 찾기 같은 오락실 게임은 영 젬병이고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 없으면 자주 갔던 길 찾기도 잘 못하는 걸 보면 시각과민, 운동감각과민은 없는 듯하다. 살짝만 음식 맛이 변해도 알아차리는 건 좀 하는 것 같은데 맛집 찾기에 흥미도 없거니와 이 세상 맥주 맛은 다 똑같고 소고기 부위별 식감 차이며 부위 이름 매칭도 못하는 걸 봐서는 미각도 고만고만한 것 같다. 후각, 운동감각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동그란 건 다 싫었다. 축구, 농구, 당구 등은 공공연히 운동 소질 없다고 소문내고 다녔으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잘 모른다는 건 최소 뛰어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니 더 이상 얘기할 만한 특별할 건 없다고 생각해도 되겠다. 관심이 없어서 기능이 퇴화하거나 아예 진화를 하다만 것인지, 혹은 반대로 기능이 떨어지니 관심이 생기지 않았던 것인지는 오락가락하다가 단정 짓기를 포기한다.


    마지막으로 청각이다. 청각 과잉일까? 난 유난히 소리에 예민하다고 생각해왔다. 취침 전에 가능한 모든 소음 유발 장치는 꺼야 한다. 그렇다고 2중 3중 방음에 귀마개를 껴야 하는 그런 병적인 수준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바란다. 화장실 환풍기도 꺼야 하고 가끔은 전자기기에서 나오는 전자파음도 없애기 위해 코드를 뽑곤 한다. 시계는 모두 초침 소리가 나지 않는 무음 시계로 바뀐 건 꽤 오래전 일이다. 미용실, 골프연습장 같은 공간에 오래 있으면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은 음악이 처음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 CD 또 한 바퀴 돌았나 보네... 하면 대부분 아 그래요?라는 반응이다. 얘들아 조용히 해봐. 무슨 소리 안 들리니? 잠깐만 멈춰봐... 그래 저 소리.. 어디서 나는 거지? 한참 소리 지르며 정신없이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분명 정상적이지 않은 미세한 소리는 여지없이 귀의 레이더에 걸리고 만다. 예이. 그런 정도 민감한 사람은 많을 거예요. 서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흔한 경우가 아닐까?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강검진에서 헤드폰 쓰고 소리가 나면 버튼을 누르는 청력검사에서 간호사 누님께서 '청력 정말 좋으시네요, 그게 들려요?'라는 얘기는 분명 아무에게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 감각 덕분에 음악에 관심이 많아진 것인지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까? 학창 시절 파바로티처럼 둥글둥글한 외모를 가진 바리톤 성악가이셨던 음악 선생님이 들려주신 오 솔레미오 한 소절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들렸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 그 감동을 그 당시에는 아무와도 나눌 수 없었던 아쉬움조차도 생생함 - 그런 걸 비춰보면 어렸을 적에도 음악에 대한 최소한의 감수성은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이 세상에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감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살짝 더 발달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음악 관련 카페, 예를 들면 하이파이 음악이나 고음질의 헤드폰을 쫓는 사람들이 이런 청각 과잉의 부류 중 하나로 보인다. 학습되었든 타고났든, 혹은 돈이 많든, 훌륭하신 분들이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면, 작가는 넘치는 생각 때문에 삶이 피곤한 사람들을 위해 자긍심을 팍팍 심어주는 심리 처방전을 제시한다. 주의사항과 함께. 생각이 많아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뛰어난 성과물을 창조하기도 한다. 반대로 특정 감각에만 지나치게 몰두되어 균형이 무너질 정도가 되면 사회성이 결여되고 지적장애로 분류되기도 한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통상적으로 지능이 높을 뿐만 아니라 감수성 등도 뛰어나 남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고민스러워하고 상처받기도 쉬우니 마인드 컨트롤에도 특히 신경 써야 한다는 내용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과 천재성이 동의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남들보다 빠르고 현명한 판단력, 이해력, 종합적인 사고력이 많아 더 많은 일을 처리하고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는 성향을 보이니 뛰어난 성과를 보여줄 확률도 자연히 높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과 일반인을 어떻게 구별할 것이며, 그런 구분을 지을만한 과학적인 데이터는 있는 내용인 것인지? 내가 남의 뇌 속에 들어가 보질 못했는데 '생각이 많다'를 무슨 수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각각의 생각의 무게를 젤 수 있을까? 감각이 예민한 것인지 그 감각에 대한 기억력이 좋은 것인지 그리고 이게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등 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당긴다. 과학과 직관적인 판단의 모호한 경계선상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확실한 차이를 구분 짓는 시원한 결정타가 없어 개운하게 마무리가 안 되는 점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어린 시절 순간순간의 기억들 중에 음악 관련 기억이 유난히 많다. 그것도 생생한 기억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뭐야, 생생히 기억한다며? 거실과 부엌의 미닫이 하얀 문턱을 바라보며 엎어져 있으면서 이어폰이라는 것을 처음 끼워보았다. 눈앞에 떨어져 있던 워크맨을 호기심에 들어본 것이다. 음악을 몰랐고 그걸 즐긴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나이였다. 이어폰을 두 귀에 꽂고 워크맨을 플레이했을 때 그 느낌은... 충격이었다. 음악소리가 머릿속에 가득했고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게 만들었고 조그만 귓구멍으로 아주 작은 스피커를 밀어 넣었으니 오롯이 내가 듣는 소리가 그 이어폰에서 나는 소리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감동이었다. 소리가 내 귀를 장악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황홀하게 느꼈다. 이게 이어폰이라는 것이구나. 신세계가 펼쳐졌다. 중학교 시절 점심시간 앞에 두 친구도 엎어져 있고 나도 엎어져 잠에 막 취하려고 할 때 들었던 Boyz II Men의 It's So Hard To Say Good bye. 그때 처음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었다. 보이즈 투맨이 빌보드에서 십몇 주간 1위를 하면서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고 어쩌고 하면서 라디오만 켜면 이들 노래가 나왔었던 시절이 있었다. 유명세만큼 여러 명곡을 남겼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이 곡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흘러나왔던 그 순간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Metallica 음반을 사러 가기 위해 어두운 저녁 시간 운동화를 신고 동네 음반점을 향해 슬슬 걸어가던 기억도 생생하다. 횡단보도 두 개 중 하나는 무단횡단을 했다. 그리고 음반점 좌측 중간쯤 위치에서 Master of Puppets을 찾아내었을 때 탄성을 질렀고 잠시 숨 멎을 듯 올라왔던 벅찬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 벅찬 가슴을 안고 다시 돌아올 때는 신호등을 잘 지키고 건넜던 그 기억까지도 생생하다. 음악을 들을 때가 아닌 음악에 대한 갈망을 했던 기억이기에 다른 기억과는 살짝 다르긴 하다. 앞서 얘기한 바리톤 성악가 음악 선생님의 오 솔레미오의 열창은 많은 친구들 속에서 어깨를 부딪힐 만큼 북적대는 일렬 의자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나와 선생님 단둘만 있는 느낌을 받게 만들어 주었다. 여전히 다른 교과 선생님 심지어 나의 담임선생님의 얼굴도 가물가물한데도 그때 음악 선생님의 넉넉한 미소, 동글동글한 외모, 소리를 끌어내었던 묵직한 뱃살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그 음악 선생님께서 내 주신 음악 감상 숙제로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은 내 인생에서 클래식이라는 음악을 그렇게 귀 기울여 뭔가의 감정을 억지로라도 끌어내어보려는 경험을 남겨주었다. 숙제를 위해 억지로 듣긴 했지만 그 이후 어느 정도 러닝타임이 있는 클래식곡도 들어줄 수 있는 인내심도 생겼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기회였던 듯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천 명의 학생 중 단 한 명이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선생님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대학시절 자취방에서 주말 아침 오디오 앰프를 머리맡에 두고 잠에 깨어났다. 형님이 수입한 CD 중 한 장을 무심코 짚어 들었다가 그 후 장장 20년 넘게 그 세계로 빠져버리게 만든 심포닉 한 음악들은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었고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기억도 있다. 8분대의 러닝타임의 록 음악. 일렉기타, 드럼 외 바이올린 등의 클래식 악기, 그 지방의 전통 악기까지 동원하였고, 중역대 목소리, 여성 고음의 소프라노가 동원한 오케스트라적인 요소가 있는 곡이었으니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한 방에 뒤엎고 음악이 이럴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전환점이었기에 역시나 이 또한 나의 음악 인생의 한 사건이 되었다.


    감동적인 경험을 하면 귀가 뜨이고 눈이 번쩍한다는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들은 대부분 음악을 통해서만 받았던 듯하다. 이런 게 흔한 일인지 남들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장엄하고 경이로운 광경을 볼 때의 시각적인 감동도 종종 잊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에는 이르지 못했다. 미각, 후각은 더 존재감이 없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야 할 만큼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봤다든지, 매력적인 고급 향수 또는 음식 향기를 맡고서 감동에 휩싸였다거나 하는 기억은 쥐어짜 보려 했지만 떠오르진 않는다. 학창 시절에는 음악을 들으며 공부도 했다. 그게 오히려 주위를 분산시키지 않고 다른 잡음을 차단시켜주는 효과를 내었기에 하던 일도 잘 되었다. 물론 잘 알다시피 그 음악을 듣고 있는 건 아니다. Listening이 아니라 Hearing 일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Hearing이 잘되지 않는다. 일단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바로 Listening이 되어 버린다. 이러니 음악을 들으며 뭘 하려 해도 잘되지 않는다. 이것도 나잇살 때문인가 아니면 중독성 때문일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게 있다면 음악이 유일한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음악을 들을 때만큼은 예전 어릴 적 넘치던 호기심만큼이나 한 없이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중독성이 내 안에 살아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서 더 오래된 과거를 떠올릴수록 청각과민은 선천적이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두 딸내미들이 공부하는데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한다고 업마가 혼내고 있다. 공부 좀 하셨던 나의 형님도 학창 시절 음악을 끼고 공부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음악이 공부에 방해가 되는 사례도 물론 있겠지만 나의 경험은 그에 반하고 있으니 두 아이를 혼낼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엄마 편이 될 생각도 없다. 두 아이에게는 균형은 찾아야 한다고 조언을 해 준다. 수능 금지곡 같은 슬픈 사례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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