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독서
악보가 외국어의 하나쯤으로 다가올 때 느끼는 소름.
알라딘 중고매장이 적당히 산책 삼아 걸어가기 딱 좋은 거리에 입점했다. 앗싸! 책이라는 녀석은 항상 나에게 대단한 유혹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거기에 담긴 내용뿐만 아니라 책의 디자인, 글자의 가독성, 이런 주제로도 책이 되는구나, 얼마나 사람이 미치면 2천 페이지짜리 책을 쓸 수 있을까? 얼마나 미치면 2천 페이지짜리를 번역할 인내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사람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등등 호기심이 이어진다. 이거 문자 중독 아닌가? (그런 호기심이 결국 책을 쓰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매장 입구부터 이것저것 훑고 지나가며 눈에 잡히는 데로 꺼내어 몇 장을 넘겨본다. 표지가 눈에 띄거나 제목이 눈에 띄거나 베스트셀러라며 따로 매대에 전시해 놓은 것 등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데로 들었다고 하는 게 좋겠다. 종이의 냄새가 좋았고 거기에 쌓인 지식들은 더 흥미로웠다. 세상에 궁금한 것은 차고 넘치는데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그걸 알려주는 데는 책만 한 게 없었기에 도서관이나 서점은 기대감을 잔뜩 머금게 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한때 그랬다는 거다. 독서에 욕심이 있었을 때 얘기다.
어느 순간 궁금함이 차고 넘치는 것만큼이나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데 그걸 다 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니 생각은 돌고 돌아 고전과 스테디셀러로 수렴된다. 금박 도장이 몇 개씩 박혀 있는 베스트셀러, 금주의 신간 중 추천도서는 꼭 챙겨 읽어보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관심사에서 잠시 비켜나있다. 그 비켜난 관심사의 자리를 피아노가 밀고 들어오더니 어느 순간 한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글도 쓰고 싶고 고전도 섭렵하고 싶지만 순서대로 나열해 보니 피아노 앞에 모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건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는 만약 은퇴 후 건강하다면 8만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한다. 어느 분야에든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간은 1만 시간이라는 법칙도 있다. 두 가지를 조합하면 은퇴 후 무엇을 하든 새로운 길에서 크게 양보해도 두세 개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3천 시간씩 세 가지 경험을 해 볼 것인지, 하나에 1만 시간을 쏟아부을 것인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고 무엇이 나에게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는 건 중요하고 만약 선택했다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집중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1만 시간을 채우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고 그걸 채우겠다고 이를 악무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꿈만 꾸고 하루 단 10분도 그 꿈을 위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는데 가슴이 너무 벅차서 움직일 수 없었던 거라고 핑계 대고 있는 것인가?
다이소에 가면 딱히 쓸 때는 없지만 가지고 싶은 물건들이 참 많다. 엄청난 유혹들이 넘쳐난다. 소비자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보는 순간 사고 싶게 만드는 정말 '제대로 설계된' 제품들이다. 서점에 가면 딱히 열독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가지고 싶은 책들이 참 많다. 요즘은 예전처럼 이것저것 관심이 산만했던 시절과 달리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음악'장르로 곧장 직진한다. 많지는 않지만 여러 음악 서적과 악보들을 헤집어본다. 중고 서적답게 어느 피아노 교수법 전문 서적에는 밑줄을 긋고 메모를 첨삭하며 음악을 공부했던 그 누군가의 공부 흔적들도 보인다. 그렇게 종이의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해설이 있는 피아노 소나타 교사용 지도서를 한 권 구매했다. 악보를 보고 연습하려는 생각보다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포인트에 관심을 기울이고, 아티큘레이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면서 독서하듯이 읽어볼 요량으로 구입했다. 악보를 정독한다. 책을 읽듯이. 책의 목적대로 피아노 독학자에게는 레슨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공부 방법이 되어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