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플레이어가 집에서 사라졌다. 내 손으로 없앤 지 꽤 오래되었다. 유튜브나 다운로드된 음원에 밀려 방 한 구석으로 점점 밀려났고 더 이상 갈 곳을 잃은 음반들은 한 장 한 장씩 중고나라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구매자는 귀한 음반을, 그것도 너무 헐값에 올린 가격 때문인지 이제 음악 생활 그만하시는 거예요?라는 진심 어린 메시지도 보내주시기도 한다. (안타까우면 일단 구매해 주시고 얘기하시지요?) 귀하다는 그 음반을 찾아 헤매던 발품도 그 음반에 담겨 보내고 싶었으나 그건 '추억'이라 부르기에 기억 속에 간직키로 한다. 추억은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시간의 증거였다. 그렇게 한 때 애지중지했던 음반들임에도 내 손에서 편안하게 떠나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한 사람의 연주만을 듣는 게 어떤 곡을 연습하는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 이유는 CD 음원도, 유튜브 음원도, 다운로드 구매한 음원도 모두 '음악'이기 때문이었다. 덧붙이자면 잡음 하나 없는 떼깔 나는 양질의 소리나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묻어나는 녹음이나 서로 다를 바 없는 '음악'이라는 의미다. 유튜브가 언제 어디서나 한결 더 손쉽게 찾아들을 수 있다는 장점 대신 음질은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긴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이 떠밀린 대세이기는 하다. 여하튼 이런 급진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도 피아노 연습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내가 하고 싶은 터치와 선율의 흐름과 음량의 세기와 페달의 울림, 오른손, 왼 손의 셈여림 등. 내가 들어내야 할 것들이 연주자마다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을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해방감, 자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 내지 안도감을 준다. 설령 그게 유명 연주자의 연주라 할 지라도 그의 연주만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점. 녹음된 음악처럼 흠 하나 없는 연주를 흉내 내는데 노력은 하겠지만 결국 나만의 색깔을 찾는 게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게 더 중요할 것 같다는 믿음이다.
때론 CD나 구매한 음원의 미스터치 없는 '완벽한 음악'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건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의 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거기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깨닫고 탈출을 시도해 본다. 거의 소음에 가까운 록 음악도, 존 케이지의 4:33도, 둘 다 자신의 감정을 증폭하여 소리로 혹은 무언의 소리로 표현해 내려는 연주자의 노력이 있다. 그 사람들이 흘리는 땀방울 흘리는 소리까지 듣고 싶었던 건 과거의 나였다. 하지만 피아노 연습을 통해 그들의 음악을 듣기가 아닌 연주라는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좋은 음반에 대한 호불호는 백지장만큼이나 희미해졌다. 그리고 나의 연습이 완벽하게 연주해야만 마무리되는 건 아니라는 점도 함께 깨닫는다. 완벽하게 하려 해도 연주할 수 없다는 건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 그래, 그런 깨달음이라도 없었다면 녹음된 완벽한 음악을 쫓기만 하다가 마음에 반창고 붙이기야 더하겠어? 과정의 즐거움을 찾겠다는 게 목표라면 그건 독이라 했지만, 과정에서 즐거움도 찾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안타까운 음악생활이고 다른 즐거움조차도 얻지 못하고 망칠 가능성이 클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