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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Apr 22. 2023

소크라테스의 변명

받아들여야 하는데 꼭 이해가 필요한 건 아니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하고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친다'


    지하의 일은 무엇이며 천상의 일은 또 무엇인가? 그런데 이게 바로 독배를 마시는 형벌을 받게 된 고발 내용이다. 원초적인 궁금증은 풀렸다. 하지만 혼란스러워진다. 도대체 이 양반은 왜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었나? 궁금증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나는 부족하나마 이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변론 (변명)이 이어진다. 재판관에게 내가 왜 잘못이 없는지를? 고발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풀어나가게 된다.


    '당신은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서 경고하고 타일렀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가르치기를 회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훈계가 아니라 처벌을 하는 자리인 이 법정에 나를 끌어냈습니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보다 약간 우월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갔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와 그 이외의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인간이 어떤 가정에서 자라면서 무엇을 배우면 이토록 지독해질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가? 명분이 없다면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평생 함께한 가난과 그의 죽음이 그것을 증명했다. 스스로 정한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단지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목숨이 걸려있는 문제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결코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 삶이 "삶은 계란"처럼 앞뒤로 뒤집는 것만큼이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바라보는 죽음의 의미이기도 하다. 약속, 믿음, 존중 그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단어들이 스쳐가지만, 허무하다. 바보스런 고집. 이기적이다.... 비판적인 단어들이 더 많이 스쳐간다. 여전히 지울 수 없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실천했을 뿐이다. 많은 유혹들을 뿌리치고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에서 만든 법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실천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그가 70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그것을 지탱하게 하고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향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능한 일인가? 머릿속에 들어차 나를 심란하게 만드는 문제가 도처에 지뢰밭처럼 묻혀 있기에 더더욱 나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본질을 탐구하고 성찰하면서 되돌아본다.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끝을 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며 결국 그 무엇도 알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는 크리스천 그들이 신이 없다고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장례식장에서 웃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드디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그리스도에게 가는데 왜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각기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뿐입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즐거워했던 것 같다. 받아들여야 하는데 꼭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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