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D-Day

by 괜찮아

소풍, 입학, 졸업, 여행, 입사 ... 그동안 내 삶에는 어떤 디데이들이 있었는지 돌이켜본다.

대부분이 주어진 것들이었다. 내가 속한 집단에 의해, 사회 통념에 의해, 실체 없는 어떤 규범에 의해 정해져 내게 전달된 디데이들을 벨트를 통해 도착한 물건들의 바코드를 기계적으로 인식하듯이 처리하기에 바빴다.


퇴사를 결심하고 집과 사무실의 내 자리를 조금씩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메모, 그림, 짧은 문장 짓기를 좋아하지만 진득히 한 곳에 기록을 쌓는 것에는 소질이 없는 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긴 노트들이 몇 십권 발굴되었다.

Things & Thoughts 라 이름 붙였던 노트에 2020년 4월 메모한 최진석 교수의 말들이 적혀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1년 3개월 후인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때에도

'새로운 삶은 전면적 부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는 말에 엄청난 충격과 영감을 받았던 듯 하다.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인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그저 처리하는 과정인가

를 인식하고 자문해야한다. (최진석 교수)


평생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며 살아왔다는 자괴감을 애써 회피하며 보낸 지난 1년

모험심으로 가득한,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발을 담그고 있던 엄청난 착각의 늪에서 알아차린 나의 현실


최근 결심을 확고히 하고 퇴사 디데이를 정하며, 얼마라도 더 받을 수 있으려면 언제까지 회사를 다녀야하는지 계산해보며 그동안 내가 내렸던 수많은 결정들은 왜 시기에 내게 질문을 던졌는지 왜 그 때여야만 했는지 생각한다. 지금껏 내게 미래를 감안하여 정해진 '그날'은 없었다.

괴로움과 환멸 속에서 무엇을 위해 내게 주어진 시간을 폐기물처럼 흘려보내는지 무엇을 얻기 위해 나는 버티는 건지 그 답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상쾌하게 정리되며 바로 인사담당팀장에게 그만두겠다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시간여의 대화 끝에 9월 6일부로 퇴사하기로 합의했다.


생각처럼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 켠에 후련하고 시원한 바람이 훅 하고 들어오는 느낌에 가까웠다.

내 손으로 빚어낸 작은 해방감 그리고 안도.

아마 태어나 주체적으로 정한 인생의 첫 변곡점이지 않을까?

앞으로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을 주저하게 될 때, 내 마음을 보기를 애써 회피할 할 때 두고두고 꺼내 볼 순간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뿌듯함.


방향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일지 터널일지 알 수 없는

끝없이 펼쳐진 시간의 대지 앞에 선 지금 이 순간

이 순간만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나 자신으로서 사는 내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확신히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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