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맘 May 07. 2019

위로가 필요한 시간.

친정부모님의 첫 번째 방문 후 나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간밤에 쉬이 잠을 청하지 못하고 마냥 누워 있길 몇 시간...... 잠들어버리면 순식간에 아침이 찾아오고 아침이 찾아오면 엄마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붙잡을 수 없는 시간 앞에 어린아이 떼 부리듯 억지를 쓰며 잠을 안 자려고 했다. 상대도 안 되는 게임인 걸 뻔히 알면서.


당연히 내 사정 따위 봐줄 리 없는 시간은 흐르는 게 마땅했고 아침은 찾아왔다. 비몽사몽 한 나와는 달리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그 꼭두새벽에 아침을 차려 아빠와 나눠먹고, 그 와중에 소고기로 장조림도 넉넉히 만들어 뒀다. 본인들 공항 배웅길 자식, 손주들 배고플까 봐 어른용 아이용 각각 주먹밥으로 도시락에, 달걀까지 삶아 껍질 벗겨 챙겨둔 우리 엄마.


순식간에 이별의 순간은 찾아왔고 할아버지, 할머니 따라서 자기도 가겠다며 우는 손녀딸의 얼굴에 엄마도 참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출국장으로 들어간 두 분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도 뒤돌아 울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아들 딸. '원래' 이 곳엔 우리 '넷' 뿐이었는데. 3달 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겠답시고 한국을 떠나올 때부터 원래 우리는 넷 뿐이었는데. 지금 사는 월세집을 계약할 때도 딸랑 네 식구가 살 집이라며 계약했었는데......


정작 한국을 떠나올 때에는 몇 달 적응하고 정리될 때까지만 버티고 나면 금방 부모님이 우릴 만나러 온다는 생각에 힘들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이미 부모님이 다녀갔으니 앞으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뒤늦게 맘이 아프다.


현관문 앞을 지날 때마다 북적북적 신발이 가득했던 지난 한 달간의 시간이 떠오르며 다시 덜렁 우리 식구 신발만 남은 것이 괜히 처량하다. 엄마가 만들어주고 간 밑반찬들만 덩그러니 남은 부엌을 보니 가슴에 구멍 하나가 휑하니 남은 것 같다.

아침부터 맥이 빠져 아침, 점심 다 엄마표 도시락에 라면으로 대충 때우고는 거의 누워 지냈다.


친정엄마의 주먹밥과 멀거니 끓여진 라면 @Auckland, NZ


멍 때리다 눈물짓다 다 잊어보려 한숨 잤다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찾아왔다. 시간도 참 빨리 흐르지.. 밤이 오는 것도 오늘은 왠지 두려워 시간이 가는 것도 싫었다.

나는 남들보다 특별히 일찍 독립했고 그만큼 엄마와 떨어져 산 세월도 길다. 뭐가 그리 잘난 딸이었던 지 더 넓은 세상에 나가겠단 생각으로 성인이 되기도 전에 홀로 떨어져 나왔던 나. 그땐 그저 내가 갈 앞길만 생각하느라 차마 뒤에 홀로 선 엄마의 쓸쓸함은 생각지 못했다. 저만치 가버리는 하나뿐인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씁쓸했을, 젊은 엄마의 맘을 떠올려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러나 더 우스운 건 아직도 그 잘난 욕심을 비워내지 못한 딸이 이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까지 다 데리고 일면 일식도 없는 더 먼 곳까지 떠나와버렸다는 것...... 엄마와 나는 대체 어떤 연이길래 이번 생 이리도 멀리 있는 걸까.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이 있다. 열일곱의 내가 부산행 무궁화호 기차 복도에 홀로 서 있다. 창밖을 응시하며 무겁고 따가운 마음을 어쩔 줄 몰라 그저 그대로 끌어안고 가만 서 있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 완전히 혼자 서야 했던 그때. 집을 떠나 혼자 예술 고등학교에 다니겠다며 상경했던 때였다. 당시 어린애는 어린애였는지 입학식을 갓 끝낸 후 일주일 남짓 학교를 다녔을까? 문득 갑자기 모든 것이 두렵고 무작정 엄마가 보고 싶어 급하게 기차표를 사서 집으로 내려가던 장면. 왠지는 기억이 없지만 그 당시 부산행 기차표가 다 매진이었던 지라 입석표를 끊어 다섯 시간을 내리 서서 가면서도 결국 갔던 기억.


오늘 다시 그때 생각이 나며 지금의 나도 그때처럼 당장 비행기에 몸을 실어 엄마 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열일곱의 나는 울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가야겠다고 엄포를 놓을 수 있었지만 서른을 코앞에 둔 애 둘 엄마인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다. 부산행 입석 기차표는 당시 이만 원 남짓이면 살 수 있었지만 오클랜드발 인천행 항공권은 이백만 원 남짓은 주어야 살 수 있을 거다. 게다가 딸린 꼬맹이가 둘. 정답이 너무 뻔하게 적힌 답안지를 앞에 두고 무력해지는 순간.



저녁이 되어 내가 부엌에서 밥을 짓는 동안 두 돌도 채 안 된 둘째가 혼자 놀다 넘어졌다. 우는 손녀에게 달려와 누가 우리 아기를 속상하게 했냐며 호들갑스레 달래줄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으니 괜스레 아이가 안쓰럽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저쪽에 있던 5살 첫째가 보란 듯이 달려와 여동생을 일으켜주곤 콧물이 났다고 엄마를 부른다. 나는 멀리서 '식탁 위의 휴지 한 장 뽑아 닦아주라'얘기했다. 아들은 야무지게 동생의 코를 닦아준다. 그리고는 데리고 나가 자전거도 태워주며 함께 논다.

그렇게 우리 네 식구의 일상도 다시 시작.

온종일 맥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보며 신랑이 캠핑놀이를 제안했다.

이미 늦은 시간, 어디 가진 못하고 집 앞 작은 마당에 텐트를 쳐준다. 그리곤 마른 나뭇가지 몇 개 가져와 불을 붙여 간단한 캠프 파이어도 준비했다. 옥수수 두 개를 포일에 싸 굽고. 와인 한 잔에 곁들이는 조용한 대화.

"우선은 일단 왔으니까 아무 생각 말고 살아보자. 일단 몇 년 살아보고 그리고 그때 다시 얘기해보자. 우리가 여기에 왜 왔는지, 정말 잘 한 건 지......"

남편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아니 나는...... 여기 생활 전반적으로는 다 만족스러워. 그냥 아이들이 커다란 가족의 구성원으로 자라는 기회를 못 누리는 것이 안타까운 거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많은 부분들이 해결될 수도 있을 거야. 익숙해질 거고...... 그래. 일단은 잘 살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보자."

텐트에 누워 잠을 청하는 오늘 밤.
찬 공기, 바짝 붙어 누워 잠든 아이들의 쌔근대는 숨소리, 가로등 불빛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위로가 필요한 시간에 딱 알맞은 위로가 포근한 이불처럼 나를 감싼다.          



2016년 말, 우리 월세집 마당에서 @Auckland, NZ









2016년 12월 29일자 이민 생활 초창기 시절 일기를 꺼내와 살짝 다듬어 보았습니다.


저자 라맘은 블로그와 브런치에 본격 이민 에세이를 쓰고 유튜브 채널 [뉴질랜드 다이어리]를 운영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lalamammy

유튜브 [뉴질랜드 다이어리] : https://www.youtube.com/channel/UCtS-ZciZCl-dOP2jf_p9xig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