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언제나 아이일 너에게
내게는 언제나 아이일 너에게.
안녕. 참으로 오랜만이다.
매일같이 지겹도록 보는 사이에 왠 오랜만이냔 소리냐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아마도 오랜만의 대상은 ‘네’가 아니라 나일거야. 너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적어내려 갈 ‘나’ 말야.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종종 끄적이고 쓰는 사람이었잖아. 가끔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엄마의 글을 읽어준다고도 이야기 했었지?
한동안 쉽게 써내려 갈 수 없는 말들을 마냥 입안에 움켜 쥐고는 잠깐씩 웅얼 대다 삼켜버리곤 했어. 때론 허공에, 술잔에 날려보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굴러다니던 종잇조가리에 아무렇게나 휘갈기고는 북북 찢어버리기도 했지.
용기가 필요했어! 다시 이렇게. 잊히지 못할 말들을 마주하기까지 말야!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도망치지 않는 시간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용기가 되곤 하더라.
(물론 그 안에 참 많은 시간을 도망쳐왔다는 건 살짝 눈감아주길 :)
새해가 되고 우리에겐 작지 않은 변화가 있었어. 네가 아주 짧은 찰나에 생각지도 못하게 크게 다쳤고 우리는 함께 구급 헬리콥터를 탔지. 다음 날, 온통 하얗고 파란 수술실 풍경 한가운데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드는 너의 이마에 입을 맞췄어. 돌아서서 나오는 나의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는데, 위로하는 의료진들에게 애써 웃으며 투덜댔던 말이 생각나.
“Being a mum, such a hardest job ever! If I knew exactly what it is, I couldn’t do this!”
(“엄마로 사는 거 진짜 못해먹겠어. 이런건 줄 알았으면 나 절대 안했어!”)
그 어느때보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너는 또 한 번의 수술을 해야했고.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애써 웃으며 버텼던 시간들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펜을 들어 또 다시 싸인을 해야만 했어. 네가 또 한 번 깊은 잠에 들도록 허락한다는 뜻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세상 가장 용감한 너를 볼 수있는 그 기회를 아빠에게도 주기로 했었는데, 기억나? 아빠가 너와 함께 수술실에 들어갔던 거. 잠들기까지 함께 숫자를 세었잖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몇까지 셀 수 있을까 우리 정말 궁금해 했었는데. 그렇지?
그렇게 세 번의 수술과 짧은 입원, 몇 번의 통원 치료가 끝나고 어느덧 다시 일상이야. 길고 뜨거웠던 여름의 기세도 한풀 꺾이고 이따금 내려앉는 햇살이 따스해. 매일 아침, 너는 갓 입학한 어린 동생까지 챙기며 씩씩하게 학교로 향하지. 엄마 아빠는 거실로 난 커다란 창을 열고 뿌듯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오늘도 재밌게 놀아~ ”
다시 감사하고 소중한 아침. 하루. 우리의 삶.
고백하건대, 엄마는 한동안 정말로 다시 이런 시간이 찾아올 수 있을 지 실감하지 못했어.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믿을 수는 있었지만. 그때 만큼은 정말이지 차마, 실감을 할 수는 없더라. 많이 큰 두려움은 모든 걸 잠식해버릴 수 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예전과 모양, 크기가 같은 손가락을 다시는 가질 수 없게 된 너의 손을 볼 때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모양과 크기의 두려움에 떠느라 도망치고만 싶었어. 아마도 너에게는 네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 중 손꼽는 사람이 바로 나일테지만, 솔직히 고백해. 엄마는 그때 정말 많이 겁이 났단다.
며칠 전 어느 밤, 너는 잠자리에 들다 말고 급하게 달려와 내게 외쳤지.
“엄마! 손가락 봐봐요! 이제 깨끗해요! 까만 실 같은 것 하나도 없어요. 짜잔!”
실밥이 떨어지고, 찢어졌던 상처가 아문 손가락을 보여주며 신나게 웃는 너를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많이 부끄러웠어. 네가 웃는데 나는 무엇을 그리 겁냈던가. 모양이 조금 다르고 길이가 조금 다른 손가락, 그것 역시 그저 너의 손일 뿐인데. 너는 여전히 하나뿐인 너인데. 나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을까. 도망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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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모두 많이 힘들어하던 때에 늘 곁에 친구들이 있어주었어. 나이, 국적, 공간을 초월한 많은 친구들. 나의 친구이기도 하고 너의 친구이기도 한 사람들. 그들의 많은 말들이 엄마를 일으켜세웠고 따뜻한 포옹이 상처를 어루만졌고 어떻게든 보여주려던 그 진심어린 마음들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 가족들의 일상 구석 구석에 와 닿았어. 아니 여전히 와 닿고 있어.
내게 무엇이 그리 두렵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언젠가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마주할 아픔이 두렵다고 이야기한 적 있어. 세상엔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님을 아는 어른인 나는, 그게 너무 미안하고 걱정된다고 했지. 그랬더니 한 친구가 그러더라. 지금 내 삶을 한 번 바라보라고. 나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분명 좋은 사람들이 더 많지 않냐고. 그래서 괜찮지 않냐고. 그러니 너의 삶도 아마 그럴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행복할 거라고.
영어에 [fall apart] 라는 표현이 있어. 한 친구가 그 표현으로 나를 묘사했었어. 허물어진다는 뜻이야. 아무리 엄마라도 때론 허물어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니 지금은 좀 무너져도 네가 다시 일어날테니 괜찮다. 다 괜찮다-
네가 보기엔 어때? 오늘 나 좀 괜찮지 않니?
이 철없는 엄마는 종종 장난처럼 너에게 묻잖아. ‘엄마 최고지?’ ‘엄마 짱이야?’ 늘 너의 대답은 한결같았어. 환한 미소로. ‘응! 엄마 최고야!’
함께 하는 동안 하루 하루 행복했던 우리를 기억해. 이 순간도 너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 나를 느끼고 네가 나를 필요로할 때 곁에 있어줄 수 있음에 감사해. 좋은 것들을 나눌 수 있도록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될게.
너와 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가족들은 물론이고 우리 곁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을거야. 사랑을 알고 전해주려는 사람들. 함께 사랑을 배워가는 사람들. 그러니 오늘도 함께 배우며 살자.
너에게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최고인 엄마가.
2020년 여름의 끝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