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일찍 일어나 더 느리게 꾸는 꿈.
아침마다 수영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다. 가끔 주말이나 여유시간을 이용해 종종 수영장을 찾긴 했지만 이렇게 아예 맘먹고 매일같이 꾸준히 해낸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아침 운동이라니. 나라는 인간이 다른 것도 아니고 아침운동을 꾸준히 해내다니.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으로 삼십 년을 넘게 살아왔건만. 심지어 알람시계 조차 없이 시작한 일이다. 여전히 나는 알람 하나 맞추지 않고 절로 여섯 시 즈음 스스로 눈을 뜨고 있다. 평소 아이들의 도시락과 아침을 챙기려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마지노선인 일곱 시 반쯤 겨우 몸을 일으키던 내가. 세상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진짜.
거두절미하고 수영을 시작한 후 내 삶은 훨씬 행복해졌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진심 어린 고백이다.
우선 몸이 덜 아프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질적으로 허리가 약해 디스크를 달고 살아왔고 두 번의 출산과 출구 없는 육아를 겪으며 처절할 정도로 매일 허리 통증에 시달려왔다. 아침에 일어나 일상을 시작하고 한 시간만 지나면 허리가 아프기 시작해 점심 즈음부터는 한 번 누우면 일어나기 힘들 정도의 상태로 매일을 버텨왔다. 매일 밤마다 화장실이라도 한 번 갈라치면 서러운 곡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그런 내가 수영을 시작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한 번에 힘차게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올레!) 싹 씻은 듯 허리디스크가 나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통증이 많이 줄어들어 일상생활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첫날 수영을 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물속에서 허리를 살짝만 뒤로 젖혀도 어찌나 뻣뻣하고 아프던지...... 어깨며 등이며 경직된 근육들의 느낌이 생생하다. 하지만 이틀째, 삼일째, 날이 갈수록 물속에서의 스트레칭이 날로 편안해지는 걸 몸소 느꼈다. 금세 몸이 많이 좋아져서 정말 신기했다.
최근 좋아하게 된 한국의 젊은 작가, 이슬아 씨가 한 팟캐스트에서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던 대목이 생각난다. 스스로를 연재 노동자라 일컬으며 매일 꾸준히 글을 써내야 했던 그녀는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일 쓰다 보면 여기저기 아픈데 아프지 않으려면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연재 노동자는 아니지만 두 아이 돌봄 노동자로 당분간은 휴직이나 퇴직 없이 매인 몸이니 나 역시 농땡이 없이 근로시간을 준수하려면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게다가 벌여놓은 일들은 또 좀 많아야지...... 나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려면 만사 제쳐두고 꾸준한 운동은 늘 0순위여야 하지 않을까.
한편 또 하나 좋은 점은, 수영을 하면 꼬인 실타래 같던 내 인생이 술술 풀리는 기분이 든다는 것.
이거 말로 쓰자니 조금 이상한데 쉽게 말해 수영을 하다 보면 자꾸만 답이 보인다.
몇 주 전, 열심히 사는 게 오히려 독인가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다 내려놓고 그저 편하게 사는 게 오히려 지혜로운 걸까, 모든 일이 주저되고 망설여지던 때. 그저 묵묵히 물속으로 팔 하나, 팔 둘, 집어넣고 뒤로 밀어내며 수면 위로 붕 떠오르는 몸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생각했다.
아, 가볍게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빠르구나. 너무 힘을 주고 애써 빠르게 나가려고 발버둥 치다간 오히려 가라앉겠구나. 몸에 힘을 빼면 물이 나를 밀어주는구나. 힘을 실어주는구나...... 어쩌면 산다는 것도 그런 걸지도. 주변 모든 것들과 싸우듯이 전투적으로 가는 것보단 그저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나라는 존재를 좀 가벼이 맡겨보면 어떨까?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혼자 힘으로 끌고 가기엔 애초에 너무 커다란 상대니까.
오늘 아침 수영장에서 우연히 둘째 아이 유치원 선생님을 만났다. 사춘기가 훌쩍 넘은 남자 형제를 키우는 중년의 아저씨 선생님이다.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달리 아이들에게 세상 다정한, 재미있는 선생님인데 평소 오며 가며 나에게도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는 분이다. 나를 발견하곤 수영장 전체가 다 울릴 정도로 활기찬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라엘이 엄마 맞죠?"
순간 수영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쏟아져 민망할 정도였다. 그 우렁참이란!
"하하;; 네. 맞아요. 라엘이 엄마예요."
"요기 바로 앞집 살죠, 맞죠? 우와. 진짜 쥑이네~ 원더풀~ 원더풀~"
"하하. 그렇죠."
"몇 바퀴나 수영해요?"
"몰라요. 저는 그냥 시간만 대충 정해놓고 되는대로 하는데.. 보통 한 오십 분 정도 해요."
"오십 분이요? 꽤 오래 하네요."
"아, 저는 빠르게 안 하고 천천히 수영하거든요."
"아, 그거 좋네요. 저도 안 세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돼요. 자꾸만 내가 얼마큼 하는지 세어보고 자꾸 더 빨리, 더 열심히 하려고 애쓰게 돼요. 안 그래도 아까 라엘이 엄마 수영하는 모습 보니 그런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거야 말로 올바른 방법인데... 하고 생각했어요. 천천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오래 해내는 거요. 나는 그게 잘 안돼요. 그래서 가끔은 수영할 때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자꾸 떠오르는 욕심을 누르고 그저 나는 아직 꿈속에 있는 거라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거죠. 물속에서 편안히 쉬는 느낌이 정말 좋잖아요, 그죠?"
"맞아요. 저도 그래요. 일종의 명상 같달까요."
"아침에 수영을 하고 유치원에 출근을 하면 그 날은 기분이 상당히 좋아요. 정말 좋은 하루를 보내게 돼요. 그런데 수영을 하지 않은 날은 꼭 뭔가 하나씩 실수를 하곤 하더라고요. 허허."
"맞아요 정말 그래요. 아침에 수영을 한 뒤로 저도 일상이 달라졌어요. 정말 좋아요."
짤막한 대화를 마치곤 우리 둘 다 자연스레 다시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물방울을 튀기며 발을 차고 손을 뻗어 올리고 그렇게 각자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매일 아침 이불을 박차고 나와 다시 찾아가는 꿈.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더욱 빠르게 가려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침마다 수영하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느리게 갈 수 있을까 엉뚱한 꿈만 꾸는 사람들은 아닐까. 굳이 일찍 일어나 느리게 가는 법을 배우겠다니, 이런 게 인생의 아이러니인가.
by 크리에이터 라맘. 찰나의 만남을 여기저기 기록합니다.
유튜브 채널 '뉴질랜드 다이어리' 운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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