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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Nov 11. 2021

바로 그 '너라서' 모멘트

11월 11일 현지에게 소연이가

현지 안녕!

사방이 노랗다. 오늘은 일에 지친 친구와 사람이 적은 곳으로 놀러 가기 위해 집을 나왔어. 짝꿍과 아침에 하루 지나고 보자면서 끈적이게 인사했어야 하는데 내가 짧은 눈물 바람을 해버렸네. 말이라는 건 왜 이리 사소한 오해를 불러올까. 이렇게 누르고 고쳐 쓴 말로 대화할 수 있음 서로 드럽지 않을까.

너가 보낸 편지 읽으면서 '왜 이사람인가' 하는 부분에서 미소 지어지대. 너와 네 짝이 우당탕탕 잘 지내고 노는 모습과 아주 그냥 싸우고 와서 내 옆에서 "왜 연락을 안 해? 도대체? 또 내가 해야 하지!" 하면서 으르렁 대던 네 모습이 동시에 떠오르는 거야. 싸우고 화해하고 눈물 바람하고 달려가고 하면서 끊임 없이 왜 이사람인지 생각했을, 결심했을 너가 그려지는 거야.

땅콩집 살자고 서로 속박하던 우리가 각자 짝꿍을 두었다니. 결혼이건 연애건 동거건 뭐건 간에 해야 겠다는 생각 없었지만 이이라면, 이이라서! 너무 결정적이잖아. 나의 동거 결심 이유? 한마디로 줄이면 나도 '이 사람이라서' 였어.

짝꿍에 대해 어느 정도 오해를 하고 있었어. 에고가 강하고 선이 짙어서 꽤 많은 시간 혼자 내버려둬야 하는 사람인줄 알았던 거지. 오해가 아니고 사실일 수도 있어. 연애 초반 내게 자기는 일주일에 삼사일은 혼자 시간을 보내야 된다고 했거든. 전문연구원 병역 3년이 끝나면 홀로 세계여행을 1년간 가겠다고도 했지. 미래를 진하게 그리기엔 이른 때였지만 난 속으로 '뭐야 나랑 뭐 하잔 거지?'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랬던 사람이 어느날 같이 살자는 거야. 동거를 하자는 거야. 난 짝이 말하는 '동거'의 의미를 듣자마자 바로 알았어. 짝꿍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서로 해온 대화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결혼 전 단계, 결혼식 전 신혼 맛보기 이런 게 아니라 '같이 산다'는 문장 그대로의 의미.

짝꿍은 설명했어. 누군가와 진자하게 만나게 되면 같이 살면서 더 깊은 관계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인생의 큰 이벤트라 정말 상대를 잘 알고 깊어진 뒤 이어지고 싶다고.

당시 내 감정은 두갈래로 나뉘어. 일단 기쁘다. 위에 말한 것처럼 제 선 뚜렷하다 여겼던 사람이 내 선을 먼저 밀고 들어와선 시공간을 같이 쓰잔다! 우리 관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날 깊게 알고 싶단 뜻이니, 좋다.

동시에 어쩌지? 난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인데. 결혼은커녕 동거는. 여기서 커녕이란 단어가 쓰인단 것 자체가 현지 너가 말한 '세간'의 시선을 신경 안 쓸 수야 없던 게지. 또 약간 두려웠어. 사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보다도, 어떤 결심으로 같이 살았는데 서로 너무 미운 모습을 봐버려 이별하게 된다면 그 상처가 깊을 것 같단 생각이 컸어.

하루이틀 생각하다가 짝에게 솔직히 얘기했지. 이런 고민이 있다. 짝은 미간을 좁히며 심각하게 말했어.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겠지만 그 최악의 결과가 무서워 뭔갈 못하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거 아니겠냐고. 내가 좋고 더 같이 있고 싶고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대. 평소 웃긴 표정 짓고 희한한 소리 내던 사람이 너무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데 그때 '오케이'가 됐어. 내 감정에 대한 설명은 길게 늘어놓고 정작 결정 내린 계기는 별 게 없네. 원래 마음 먹는 순간은 짧고 사소한가봐.

엄마아빠에게 말하는 데까진 몇 주가 더 걸렸어. 분명 선언하는 순간 결혼 이란 전제의 유무를 물으실테고 K부모님으로선, 특히 딸 가진 K부모님이라면 더 민감하게 반응하시리라 빤히 예상되잖아. 엄마아빠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동거하겠다고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사실 서른 먹은 성인이 삶의 방식 정하는 데 부모의 동의와 허락이 필요하진 않지. 그래도 날 30년을 길렀는데 그 정도 설명과 설득은 할 수 있지 않나 싶더라.

엄마아빠를 만나 이야기를 꺼내니 엄만 쇄골을 탁 짚었고, 아빠는 짝꿍에게 물었어. 얼마나 진지하냐. 짝은 내가 본 가장 진지한 모습으로 답했어. 사실 선의의 과장을 살짝 담았어. 결혼 전제라고. 아빠는 (짝이 사들고 온 선물이자 뇌물을 받아서인지) 반대할 생각 크게 없다면서 엄마에게 결정권을 넘겼어. 며칠 뒤 엄마는 내가 행복하면 그리 하라고 했어. 사실 우린 그 전부터 집 구하러 다니고 있긴 했지. 60년대생이지만 꽤나 열린 엄마아빠란 믿음이 있었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내 마음 흐름과 과정을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 너에게도 '그러자는데 어쩌지?' '하기로 했다!' 큼지막하게만 얘기했던 것 같아. 되짚으니 그때 생각과 마음이 새삼스럽다.


렇게 얘기하다 보면 결혼과 동거는 어떻게 다른 건가 궁금해져. 동거의 사전적 의미가 같이 산다는 거니까 엄연히 따지면 결혼에 포함되는 개념 같기도 하고. 근데 사회가 굳이 별개로 인식하니까, 궁금하네. 현지 네 생각은 어때?


날씨가 너무 좋다. 오늘의 단풍 사진 하나 놓고 간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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