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된 마을 팽나무와 대나무들은 다 지켜봤을테주.

온 가족이 죽어나간 터에 다시 사람이 살아지쿠과.

by 시안

붉은 화산송이 깔린 옴팡밭.

거기 누운 순이 삼촌 동상은 여전할까?


소설 '순이 삼촌'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해안가 마을 옴팡밭에 누운

순이 삼촌 동상을 떠올렸다.

잠들듯이 모로 누워 웅크린.


벌써 4월이 다가오고 있구나.

그 마을 너분숭이 4.3 기념관 뜰에 있는

순이 삼춘 문학비와 애기 무덤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분숭이 4.3 기념관 앞에 차를 멈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기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념관에 들어섰다.

마침 기념관 뜰에 세워진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무리가 있어서 그들속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묵념이 끝나고 해설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스크랩한 순이삼춘 소설 속 몇몇 문장들을

꺼내 들고서 참가자 몇 분에게 낭독을 권했다.

나는 한 참가자가 육성으로 읊는

순이 삼춘 소설 속 문장을 들으며

눈을 감고 소설 속 장면을 상상했다.


동쪽 해안가 마을 그곳은

온 동네 각 가정마다 제사 날짜가 같다.

음력 섣달 열 여드레 날이 되면

한 날 한시에 마을 모든 가정이 제사를 지낸다.


그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순이 삼춘 본문 중에서


위령비 앞 바다에선 거칠고 날센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는 둥그렇게 모여 서서

참가자가 읽는 소설 속 문장 몇 구절들을 함께 들었다.

슬그머니 눈물이 차 올랐다.


나는 누가 볼까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집게손가락으로 양 눈초리를 슬쩍슬쩍 닦아냈다.

몇몇 사람도 나처럼

남들 모르게 슬쩍슬쩍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우리는 위령비 옆 옴팡 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옴팡 밭에는 순이 삼춘 문학비가 서 있고

문학비 앞에는 검은색 고무신 한 짝과

정갈한 흰 고무신 한 짝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현무암을 깎아 만든 순이 삼춘 동상은

소설 속 장면처럼

옴팡 밭 가운데에 웅크려 모로 누워있었다.


밤색 두루마기에 따뜻한 토끼털 목도리까지 두르고 자는 듯 모로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는 먹다 남은 꿩약 사이나가 몇 알 갱이 흩어져 있고……

순이 삼춘 본문 중에서


화강암으로 조각된 순이 삼춘 동상이

실제로 옴팡 밭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순이 삼춘 모습으로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생생한지

나는 해설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내 시선은 줄곧 웅크린 채 모로 누운

순이 삼춘에게로 향해 있었다.



소설 속 문장들이 새겨진 화강암 비석들은

옴팡 밭에서 희생된 그들처럼

이리저리 불규칙적으로 눕혀져 있었다.


소설에서 표현하기를 당시 옴팡 밭 희생자들은

무밭에서 아무렇게나 뽑힌 무들처럼

이리저리 누워있었다. 했는데

그것들도 그렇게 놓여있었다.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어간 옴팡 밭엔

화산 송이 자갈들이 붉게 깔려 있다.

나는 옴팡 밭 화산송이 위를 자박자박 소리 내어 걸으며

그 붉은 화산송이 자갈들이 그때 희생된 이들

핏물을 머금어 여태 붉은 거라 생각했다.


기념관 뜰 애기 무덤들 앞에서 해설자가 말했다.

제주에서는 애기가 죽으면

동네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죽은 애기 부모 몰래

아무 곳에나 봉분도 없이 묻어버린다 했다.

부모가 죽은 애기랑 정을 떼라고 그리 한다 했다.


죽은 애기랑 정을 떼라고

부모도 모르게 봉분도 없이 아무 곳에 묻어버린다니.

봉분도 없이 아무 곳에나 묻힌 애기는

찾아오지 않는 부모 때문에 얼마나 슬플 것이며

자식이 어디에 묻힌 건지도 알 수 없는

애기를 잃은 부모 마음은 또 얼마나 슬플까.


매년 4.3이 다가오면

이 애기 무덤들 앞에는 죽은 애기들을 위로하고자

사탕이나 장난감, 신발 그러한 것들이 놓인다.


나는 그날 내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사탕 네 개를 애기 무덤 앞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내가 사탕을 내려놓은 돌 위에는

자그마한 파란색 비행기 장난감이

뒤집어진 채 놓여있었다.


마을 공동묘지 부서진 관


지인과 올레길을 걸을 때였다.

우리는 동쪽 해안가 북촌 마을로 들어섰다.

순이삼촌 소설에 등장하는 바로 그 마을이었다.

당시 화를 피해 간 집은 단 한 가정도 없다는.


방송국에서 20년 넘게 4.3사건을 취재해온 지인은

나에게 그 마을에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3 사건이 있고 육십여 년이 지난

2000년 언제쯤인가 벌어진 일이라 했다.


앞장서서 동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몰며 살아남아서

제주를 떠나 육지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그 남자.


그가 죽고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을 따라

마을 공동묘지에 그의 관을 하관 할 때였다.

지나가던 동네사람이 물었다.

누구네 식군데 여기에서 장례를 치르는 거요?

아버지 성함은 ㅇ아무개입니다.고향이 여깁니다.


그 남자의 관이 하관도 되기전에

그 소식은 마을 사람들에게 금새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다급히 신발을 꿰차 신고

밭일하던 흙투성 손에 닥치는 대로 잡힌

호미와 낫을 들고 마을 공동묘지로 뛰어갔다.


분노에 쌓인 마을 사람들은

그 남자의 관으로 우르르 달려들었고

관은 낫으로 찍히고 곡괭이로 부서졌다.


그는 고향마을에 묻히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그 남자 가족들은

부랴부랴 그의 관을 수습하여 들쳐 매고

다시 육지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였다.


그 마을 한복판을 걸으며 이야기 속 모습을 상상했다.

현실이라 하기엔 믿기 어려운 이야기.

하긴 그래.

살다 보면 영화나 소설보다

현실이 더 비참하고 비극적이지 않던가.


90살 노인의 모피코트와 웨스턴부츠


그가 나에게 공동묘지 남자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집 뒤 십만평 땅주인인 노인을 떠올렸다.

4.3사건때 땅부자가 된 그 남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중산간 마을은

사삼 때 사라져 버린 마을터에

집 몇 채가 남아 겨우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오십여 가구가 오손도손 살던 마을이

4.3때 모조리 불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죄 없는 마을사람들이 연기처럼 사라졌을 때

누군가는 주인 없는 집. 땅. 초원에 눈독을 들였다.


그 와중에도 물욕에 눈이 먼 인간들은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려

어찌어찌 서류를 조작하여

자기 명의로 땅과 집을 돌려놓거나

죽은 이들의 그나마 살아남은 혈육인

먼 친척들을 찾아가 말했단다.


온 가족이 죽어나간 그 집터에

다시 사람이 살아지쿠과.

그 땅 닭 두 마리에 나한테 팝서.

그 말을 듣는 이도 난리통에 배를 곯고 있던 참이라

경헙써.(그럽시다) 하고는 닭 두 마리에 땅을 내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 집 바로 뒤

십만 평도 넘는 초원의 땅주인 이야기다.


피바람 속에서 땅부자가 된 그는

90살이 넘도록 잘 먹고 잘 살았다.

평생 꼬장 꼬장했고 말과 행동은 거침없었다.


언젠가 동네 산책길에서 그 노인을 마주친

남편은 그렇게 회상했다.

90살 넘은 노인은 모피 코트를 걸치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딱 달라붙은 청바지를 입었는데

술이 화려하게 달린

무릎까지 올라오는 웨스턴 승마부츠를 신었더라.

한눈에 보아도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었다고 했다.


나이 90이 넘어

모피코트에 딱 붙는 청바지와 술달린 웨스턴 부츠라니.

그 늙은 남자가 과거에

모피코트 사 입을 부를 어찌 쌓아올린건지

그 옷차림이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모은 땅을 아들들에게 떼어주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 목장옆 끄트머리 수만 평을 받아

다른 이름으로 목장을 지어 들어앉았다.

그의 아들은 또 그의 아들에게 목장을 넘겨주며

지역 유지로 대우받으며 지금을 산다.


나는 우리 집 주변 십만 평 땅주인 이야기를

4.3때 살아남은 동네 어르신을 통해 들었다.

어르신은 당시 8살이었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중산간 동네는

과거 소 키우고 말 키우던 말테우리들이

어우렁 더우렁 살던 동네였다.


지금은 예전에 이곳이 마을이 있었음을 알리는 추념비와

과거에 그곳이 집터였음을 알리는

대나무 군락만이 바람에 쏴아아 흔들리며 서있다.


우리 동네 초원 군데군데 서있는

수백 년 된 팽나무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팔십 년이 넘도록 군락진 대나무들은

말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불타오르는 마을과 콩 볶는듯한 총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타버린 집터들이

탐욕스러운 노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역사를.


집 주변 초원으로 뻗어있는 산책로를 걸을 때마다

초원 귀퉁이 이곳저곳에

밀도있게 자리잡은 대나무 숲들을 본다.


그 대나무들은 초원을 훑으며 바람이 지날 때마다

서로에게 몸을 비비며

스스스슥하며 음산하게 운다.


과거 마을길 어디쯤이었을 동네 샛길을 걸을 때,

나는 대나무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팔십 년 전 이곳에 억새 지붕을 이고

대나무들 앞에 서 있었을 초가집들과

돌담들과 마을길을 걷고 있는 상상을 한다.


자그마한 흙마당엔 수줍은 봉선화가 피고 지고

장대로 지지해 둔 줄에는 희어연 빨래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을.

이맘때쯤이면 돌담밑에는 노란 수선화가 피었으리라.


은밀하게 집을 감추며

돌아들어간 마을 돌담 올레길 안에서

누렁개가 달려 나와 지나가는 나를 경계하며

웡웡웡 짖어댔을 테고.

대나무 숲을 낀 초가집마다

저녁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을 테지 상상한다.


이제는 대나무 숲만 무성한 빈 집터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대나무숲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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