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올라온 사회초년생이 저축을 하는 건 기적에 가깝다
사회초년생의 저축은 미덕이고
요즘 MZ들은 저축을 하지 않아서 문제고
한달에 얼마씩 저축을 하지 못하는 건 그들의 문제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물론 서울-경기권에서 취업을 한, 주민번호 뒤 두번째 자리가 0~2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금액을 저축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지방에서 올라온 사회초년생이 저축을 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사회초년생 시절, 그러니까 서울에 올라온 지 이제 막 한달이 되고 회사를 다닌지도 며칠 되지 않았던 때. 회사의 대리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스몰톡을 나눴다.
그 회사는 특이하게도 호봉제여서 직급별 연봉테이블이 모두 공개되어 있었는데,
덕분에 서로의 연봉 얘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저축을 더 해야하는데 쉽지 않네요"
당시에는 연봉별 실수령액이나 고정비, 생활비에 대한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저축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니 "공부열심히 해야죠"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경험을 살려 "저축 해야죠"라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
그때 대리님이 물었다
"월에 얼마정도 저축하시게요?"
나는 답했다
"어.. 잘 모르겠어요 한달에 10만원? 20만원?"
대리님은 사뭇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정도라도 꾸준히 저축을 할 마음이 있는게 대단한거라며 나를 추켜세워주었다.
"대리님은 한달에 얼마정도 저축하세요? 제가 아직 월급을 한번밖에 안 받아봐서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지금만큼 사회생활 짬이 찼다면 물어보지 않았을 질문이지만, 사회초년생의 무지함은 곤란한 질문을 하는 용기를 내게 해 주었다.
대리님은 대답했다.
"어.. 저는 한달에 70만원정도?"
"네? 대리님은 한달에 70만원이나 저축을 하세요? 진짜 대단하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대리님은 저축액을 조금 낮췄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날의 대화는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나도 저정도를 저축해야하는 걸까? 저축을 할 수 있을까? 귀가 후 계산을 해 보았다.
당시 월급은 실수령액으로 168만원이었고, 월세는 50만원이었다. 그나마 관리비와 잡비(가스, 전기, 인터넷 등)가 모두 포함된 금액이라는 점이 희망적이었다.
점심식대를 주지 않는 회사였기에 월 20만원의 점심값이 고정으로 들었고,
매주 금요일에 5만원 내외의 장을 봐서 아침/저녁과 주말 식사를 해결했다.
핸드폰은 월 4만원 정도 요금을 내는 알뜰폰으로 개통해서 썼고, 모아둔 돈으로 자급제폰을 사용했기 때문에 할부금은 들지 않았다.
모두 합하면 94만원. 어? 168만원에서 94만원을 빼면 빠듯하게 70만원을 모을 수도 있겠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다짐은 곧 깨졌는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포멀한 옷이 없는 초년생은 매달 옷을 사야했다. 다니는 회사가 세미정장을 요구했기 때문에, 첫 달은 서너벌을 조합을 바꿔가며 버텼고 다음달 부터는 매달 10만원 정도의 옷을 구매했다.
평생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살다 왔던 촌년생(?)은 처음보는 쌓인 눈 앞에서 좌절하며 방한템을 사야했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는 워커를 1만원주고 샀고(특가세일 대박), 겨우 몸을 다 두를 수 있는 얇은 롱패딩을 그래도 아울렛에서 8만원에 샀다. 구스다운? 8만원 이상의 패딩을 살 자신은 없었다. 젊은이의 패기로 나머지는 버텨야지.
회사에서는 슬리퍼를 신고, 텀블러를 이용했다. 슬리퍼 -1만원, 텀블러 -2만원.
첫 살림집에는 매달 많은 것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저렴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이소에서 구매할 수 있는 건 다이소제로 마련하고 나머지는 홈플러스나 이마트를 이용했다. 첫 살림을 마련하는데도 기십만원이 들었다.
그래 여기까지 33만원. 아직 41만원이 남아있었지만,
"서울로 이사 왔다며? 한번 보자"
하루 친구를 만나면 -5만원, -10만원.
서울살이에 지쳐 잠시 고향을 방문하면 기차비 -10만원.
정장에 들 수 있는 가방, -3만원.
감기라도 걸리면 병원비와 약제비, -3만원......
그렇게 첫 세달이 지난 후 내 통장에 남은 돈은 3만원이었다.
그 3만원으로 주택청약부금을 납부한 후, 나는 왜 서울에 왔을까 진지한 고민을 했다.
이렇게 한 달을 벌어 한 달을 사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 나는 왜 낯선 서울에 왔을까?
매번 커피를 사주시고, 챙겨주시는 사수에게 차마 저렴한 커피를 사드릴 수는 없어 스타벅스를 쏘겠다고 말하면서도 내 통장에 남은 잔액이 충분할까를 고민하는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아지기는 할까?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놀랍게 삶이 나아졌다.
달라진 건 많지 않았다.
내가 서울살이에 조금 더 적응했다는 것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품 (밥솥, 냄비, 밥상, 이불 등)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
최소한의 4계절 대비가 되었다는 것
연봉협상 덕분에 실수령액이 30만원 올랐다는 것 (연봉 얼마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달에 내게 들어오는 돈이 중요했으니까)
서울에서의 삶이 1년 씩 쌓일수록, 내 삶은 정말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고
지금은 몇달 돈을 벌지 못해도 버틸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럼 더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취직을 하면 되는데"
"월세를 더 저렴한 곳으로 가면 되는데"
"점심은 무조건 도시락을 싸 다니고 혼자 먹으면 되는데"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약속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데"
"매번 저렴한 물건을 사고,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으면 되는데"
와 같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지만.... 뭐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평가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갑자기 이 시절의 내가 떠오른 이유는,
이제는 팀장이 된 내게 한 팀원이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밖에 저축하지 못해서, 이것밖에 해내지 못해서 부끄러워하는 그 팀원을 보며
나는 몇년 전의 나를 떠올리며 '그게 당연한거다. 나도 그랬다'는 말을 건넸지만,
그 친구에게는 마저 다 할 수 없었던 자세한 얘기를 문득 털어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