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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서 잠실이 멀다고?

외선순환은 뭐고 내선순환은 뭔데

by 방구석 공상가

13살 봄,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발을 들여봤다. 발이 아니라 바퀴라고 해야할까? 수학여행으로 서울에 왔지만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서울 투어를 했었다.


18살 여름, 서울행에 실패했다. 전국 논술대회 입상 후 시상식을 핑계로 서울구경을 해보려 했는데 혼자서 '그 험한 길'을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반대했으므로.


19살 겨울, 처음으로 '스스로' 서울 땅을 밟아봤다. "서울 대학은 안된다"는 엄마의 반대를 무릎쓰고 굳이 원서를 넣었고, 논술시험을 쳤다. 합격여부는 확인하지도 못했다.


21살 여름, 서울에 '놀러' 왔다. 살면서 처음으로 홍대, 강남, 혜화를 방문했다. 오전에는 홍대, 오후에는 강남, 밤에는 혜화를 가는 일정이었다. 홍대에서 강남이 먼 줄은 그 때 처음알았다.


24살 겨울, 홍대 클럽을 처음 가봤다. nb2였던것 같은데, 오후에는 서울대입구, 밤에는 홍대, 다음날은 신도림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때 친구에게 "잠실에 가보고싶다"고 했더니, "잠실은 멀어서 가기 곤란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홍대나 잠실이나 2호선 아닌가? 나는 서울에 5시간을 걸려 왔는데 그것보다 먼가? 물론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27살 여름, 캐리어 두개를 무궁화열차에 싣고 서울에 입성했다. 구로디지털단지역 앞, 1평 남짓한 고시원이 내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이 때도 잠실은 가보지 못했다.


28살 겨울, 드디어 잠실에 처음 가봤다. 그것도 6시간을 운전해 나를 보러 달려 온 아빠의 차를 타고. 잠실롯데타워는 너무도 컸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내려다보진 못했다) 서울은 한 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경남에서 태어나 경남에서 자라고, 경남에서 수학한 나는 지금 서울에 산다.

서울시장선거에 투표권도 행사해 봤고 (이거 정말 중요함)

고향에서 딴 운전면허증도 갱신하여 신분증 상으로도 나는 그냥 서울에서 면허증을 발급받은, 서울시민이다.


내 삶의 여정이 서울입성을 향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서울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얻게 된 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훈장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저 여정에, n살, 서울에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글이 적히기를 바란다.



여전히 내집 마련은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서울'에 내집마련을 하기는 참 요원하지만

나는 훌륭히 '서울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같은 호선이면 막연히 가깝다고 생각했던 내가 지하철로 20분 거리만 되어도 멀어서 못간다고 손사레를 친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는 홍대도, 잠실도 먼 곳이다. 이게 바로 서울사람의 아이덴티티가 아닌가?


라고 생각해오던 나는, 며칠 전 시청역에서 강남역을 향하며

외선순환을 타야할지 내선순환을 타야할지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외선순환은 어디로 가는거고 내선순환은 어디로 가는거지? 갈림길에 서서 표지판을 바라보다 문득 처음으로 2호선을 탔던 순간이 떠올랐다. 홍대와 잠실이 옆동네인줄 알았던 과거의 내가, 이제는 외선순환이 뭐고 내선순환이 뭔지도 모르면서 둘중 하나를 고민할 정도는 되었구나.


물론 고민은 깊지 않았다. 거금을 주고 산 핸드폰을 열어 터치 몇번 만으로 최적의 경로를 찾았으니까.

아, 근데 내가 탄 건 신도림방향이었는데. 그게 외선순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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