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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대장정을 다녀온 지 12년만에 쓰는 후기

세상의 쓴맛은 느꼈지만, 기억의 단맛이 더 커요

by 방구석 공상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시절 부터 나는 무언가를 '하는'걸 좋아했다. 이거 해볼사람? 저요저요. 내가 아는데 경험해보지 않은 게 있다면 기분나빠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그런것도 해봤어요? 안해본게 뭐에요?"라는 말을 듣는 어른이 되었다.


경험이 많다는 것의 장점은 사실 뚜렷하지 않다. 생각나는 건..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어떤 주제가 나와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거? 아. 취업 초기에는 자기소개서에 적을 건덕지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지금은 경력이 쌓여 이직을 할 때 자기소개서를 적을 일이 없어졌지만.


하지만 경험의 장점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선명한 기억은 12년 전 국토대장정을 갔을 때인데, 12년 전 일임에도 5년 전의 일 보다 훨씬 또렷하고 생생하다.


우리 과는 빡세기로 유명하다. 졸업을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학점만 142학점. (나는 169학점을 듣고 졸업했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빡셈(?)에 앓던 2학년 1학기, 점심을 먹으러 학생회관에 갔다가 국토대장정 포스터를 발견했다. 오? 방학을 알차게 보낼 수 있겠는 걸? 갔다 오면 머리를 좀 식힐 수 있겠는걸? 지금이 아니면 못하는 거잖아? 그냥 끌리는 대로 겁도 없이 스텝으로 신청을 했다.


당시 국토대장정이라 하면 두 단체가 손에 꼽혔다. 하나는 박카스였는데. 여러분들이 아는 그 박카스가 맞다. 거기서 100명정도를 선발해 공짜로 국토대장정을 시켜줬었다. 당연히 경쟁이 엄청 치열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택한 곳인데, YGK라는 곳이었다.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규모로 치면 박카스는 비교도 안 됐다. 전국 10곳에서 각각 팀이 출발해 파주에서 만나는데, 한 팀당 최대 인원이 200명, 스텝은 50명으로 총 2000명이 넘게 참여하는 규모였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자비를 들이는 만큼 참여에 조건이 까다롭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최대인원이 채워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청하고 돈만 내면 참여할 수 있었다)


일반 대원과 스텝의 차이는, 우선은 비용이 달랐다. 대원이 45만원이고 스텝이 25만원이었나..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나는데 대략 이정도였던 것 같다. 스텝으로 신청한 이유는 싸기 때문도 있지만, "직접 만들어가는"이라는 설명문구에 꽃혔기 때문이었는데, 직접 만들어간다는 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어야 한다는 건 줄은 몰랐다. 떠먹여서 키워주는 것에 익숙했던 20대 초반의 나는 이 때 세상의 무서움(?)을 알게 되버렸는데,


1. 일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적당한 일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일을 잘 해야 한다. 처음이든 아니든. 내가 안하면 쟤가 해야하는데, 쟤가 안한건 내가 해야한다. 그래서 같이 하는 일은 안하면 욕먹는데, 그렇다고 너무 많이 하면 또 욕먹는다. 지만 일하냐며. 그 중간 어딘가 쯤에서 일을 적당히 열심히 놀면서 해야하는데, 이 때 그 선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았다.


2.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스텝들은 소속 팀이 가는 루트에서 적당한 숙영지(주로 학교/공공기관)를 선별해 협조 공문을 보낸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국토대장정 함 해볼라는데 잘곳좀 빌려주이소! 여러 스텝들이 나눠서 컨텍을 하기 때문에 일자별로 나눠서 1일차는 A씨와 B씨, 2일차는 C씨와 D씨가 책임지고 숙영지를 구하는 형태였는데, 나는 9일차였나.. 10일차였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담당한 날의 숙영지를 구하기 위해 5~6군데의 학교나 공공기관에 연락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모두 거절당했고, 다행히 나와 같은 일자를 담당한 스텝이 숙영지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3. 남의 돈은 그냥 쥘 수 있는 게 아니다. 생전 처음으로 기안서, 계획서, 보고서를 작성해 봤다. 스텝들은 대장정 출발(7월 중순) 전 부터 대장정이 차질없이 진행되게 하기 위한 말 그대로의 모든 작업을 다 하는데, 그 중에는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사전 모임을 가지는 활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엄마한테는 전화한통 하면 돈을 보내주지만, 남의 돈은 사용목적과 필요성, 최저가 여부 등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야만 받아낼 수 있었다.


4. 나이가 전부는 아니지만, 어리면 무시당하기가 쉽다. 대장정에 오르기 전 스텝들에게는 내 나이를 그대로 밝혔는데, 그 때부터 내가 뭘 하든 "애기"로 보는 시선밖에는 없었다. 잘 챙겨주기는 하지만, 은연중에 '이 나이에는 이정도 밖에 못하니까'라는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달까. 그래서 대장정을 진행할 때는 나이를 4~5살쯤 올려서 말했다. 내 나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시선이나 대우가 달랐다. 내가 내리는 결정과 제시하는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고, 협조를 받아내기도 쉬워진 것이다. 마지막 날 나이를 밝히면서 모두의 원성(?)을 샀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이를 속인 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5. 열심히, 잘, 최대한, 이런 기준들은 모두 주관적인 거였다. 나는 열심히 했는데 의미없는 일에 시간을 쓴 걸수도 있고,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남들과 비교해서는 자부할 수준이 아닐수도 있고, 최대한 한다고 했는데 남이 대충한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 21살의 나는 경험도 생각도 짧았고, 내가 최대한을 한 것보다 남이 대충한 게 훨씬 낫다는 걸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자기 객관화가 안되었달까. 하지만 사람들과 한달 내내 24시간을 함께 하며 '일'을 하다보니, 놀면서 일하는 것 같은 저 사람이 사실은 나보다 훨씬 빨리 일을 끝내고 쉬는 거라는 걸. 아무것도 안하는 것 같은 저 사람이 사실은 남들 모르게 많은 것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물론 열심히 하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반대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장정 당시에는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정말 힘들었다. 잠도 못자고 (지금 생각해보면 잘 수 있는데 내가 안 잔거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생하고.. 더럽고 덥고.. 하지만 내가 선택한 수 많은 '사서 하는 고생'중엔,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그리워서. 지금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은 놓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결과가 나쁜 경우도 있었지만, 해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운이 좋다면 해보는 것 이상의 좋은 기억과 배움을 얻게 되니까.


국토대장정에서 만난 인연 중에는 아직까지도 닿아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글을 쓰다보니 문득 이 선명한 기억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졌다. 기억의 단맛을 간식삼아, 커피 한잔을 권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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