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시(寅時)가 되기 전에
-들어가며
검은 인형들의 춤이 시작되면 곧 백중이다. 성읍에 있던 민초는 모두 초가삼간 아래 숨어 들어가고, 성 밖에 떠돌던 망령과 잡신들과 고된 백성들의 한과 원망이 서린 지박령들이 초인들의 구마를 피해 산 능선을 타고 계곡물처럼 흘러 이승을 떠난다. 이윽고, 검은 인형들의 춤이 멈추면, 초야는 고요해지고 산짐승마저 숨죽이고 잠에 드는 자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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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 자야. 자니? 이제 떠날 시간이다. 채비하거라."
'부스럭'
"자야."
입추가 지난 것도 보름이 되었으니 밤 기온이 꽤나 떨어져 산기슭은 이미 초겨울 날씨와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직 열두 살 밖에 안된 행장이에겐 꿀 같은 잠을 자다 일어나기가 너무나도 벅찬 늦음 밤이었다. 선준은 행장이를 '자야'라고 불렀다.
"아니, 벌써 가능교? 저녁 먹고 한참 자다가 간다고 하지 않았능교?"
"자정에 떠난다고 했잖니."
행장이는 부스스한 눈을 채 뜨지도 않고 이불을 주섬주섬 갰다. 삭일이라 그런지 달도 없는 밤은 더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목탁과 부적은 챙겼지?
"암요. 근디 스님도 아님 서 목탁은 어디서 났데요?"
"알 거 없다."
선준이 행장이를 데리고 다닌지도 한 해가 다되어간다. 행장이는 악귀의 만행으로 역병이 돌았던 전라도의 작은 산촌 마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절에서 나고 자란 선준은 어린 시절부터 법력이 높다는 스님들의 구병시식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구마를 할 때 아주 드물게 개중에는 구병시식은 물론 금강경과 항마진언에도 끄떡없는 귀신이 있었다. 보통 이 경우는 악귀였다.
원한이 있는 경우도 대다수지만 악귀가 된 지 십 수년이 지나면 그 어떤 스님이나 무당도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곤 했다. 그대로 두면 장군신들도 꽤나 골치 아파한다.
이런 부류의 악귀들이 한 곳에 모여 원혼을 거두기 위해 괴랄한 잔치를 벌이거나 악귀끼리 한 판 붙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럴 때, 종종 한 마을에 도적떼가 들거나 침략, 전염병 그리고 호환 등의 큰 환란이 일었다. 소위, 귀신이 장난치는 것이다. 행장이는 그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다.
'끼이익'
"벌써 가실라꼬예? 아직 날이 추분데.."
아궁이에 불을 때러 나온 주막 아주머니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선준과 행장이를 보며 말을 건넸다.
"날도 이래 추분데. 묘시(卯時, 오전 5시 오전 7시)나 돼서 동이 트면 아침 참이나 자시고 가시지예. 어디 한양에라도 가시나."
"아입미더. 지금 갈 곳이 있어가. 얼른 가야함미더."
선준이 대답하자 행장이가 그를 궁금한듯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불까지 다개고 나온 행장은 선준의 옆에 섰다.
"아지매, 잘 묵고 쉬다 감미데이."
달도 없이 캄캄한 삭날이라 행장이는 두 눈을 아무리 똥그랗게 떠도 한자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재, 아재. 그면 이제 부목산으로 가능교?"
"응."
행장이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도통 자는 건지 걷는 건지 가끔 선준이가 그의 팔이나 어깨춤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필시 나무 둥지나 풀섶에 걸려 넘어졌을 판이다. 둘은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이미 시간은 축시를 지나고 있었다. 인시(寅時, 오전 3시 오전 5시)가 되어 동이 트기 전에 부목산의 신귀사로 가야 했다. 때는 백중이 지나고 두어 달이 다 되었다. 선준은 주지 스님이 남긴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백중에 저승문이 열려 많은 망령이 이승을 뜨지. 그래서 백중이 지나면 당분간 귀신 없는 날이라고 믿고 잔치도 했단다. 원혼제도 지냈고. 그런데 귀신은 백중 후에 가장 많이 모여. 거의 백중 때 저승문을 건너 간만큼의 귀신들이 모여들어. 천지 귀신과 악귀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녀석들이 마침내 백중이 지났으니 자기네들 판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앞으로의 일 년을 즐길 수 있으니 살판이 난 게야.’
이윽고 잠이 깬 행장이가 선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재, 근디 아재는 왜 아까 주막 아지매한테는 사투리를 썼능교? 아재, 한양 말하지 않소?"
선준이는 혼자 웃고는 말이 없다가 느지막이 대답했다.
"몰라도 된다. 자야. 갈 길이 멀구나."
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두 시진이 넘게 걸어갔다.
"아재, 쩌어기 연기가 보이는디. 민가 아잉교?"
과연, 행장이의 말대로 일 리가 좀 안 되어 보이는 거리에 왠 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한 시진도 넘게 걸었고 이제 막 인시에 접어들 때쯤이라 선준도 만약 민가가 보이면 잠시 목이나 축이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멀리서 보이던 민가 쪽으로 향하는 작은 고개를 넘을 쯤이었다. 달도 없이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선준은 세 길 앞에 희뿌옇고 허연 마치 여인네 같은 무언가가 서 있는 게 느껴졌다. 행장이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민가에서 쉬었다 간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자야. 잠시만 조용히 있어보거라."
선준은 필시 저것이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고개 너머에 민가가 있지만 저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가야 했다. 잡귀나 원혼이라도 붙으면 오늘 일에도 지장이 있을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선준은 행장이를 잠시 길에 두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한 밤중에 웬 여인네가 산중에 있단 말이오. 그러다 범에 물려가거나 산적 떼에 잡혀가면 어쩌려고 그러오?"
희뿌옇고 허연 무언가는 다름 아닌 흰소복을 입고 길에 서있던 낯선 여인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지아비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지아비가 나간 지 사흘이 지났는데 기척도 없던 중 멀리서 두러두런 말소리와 걸음이 들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나왔지요."
선준은 한 밤중에 낯선 남자 둘을 맞닥뜨린 이 여인네의 당황스러움과 심중의 두려움을 고려하니 여간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장이는 반 길 뒤에서 이를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구려. 걱정돼서 한 말이오. 보시오, 혹시 무리가 아니라면 댁에서 목만 좀 축이고 갈 수 있겠소?"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헌데, 치마를 입은 여인의 걸음걸이는 어찌나 빠른지 선준도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지만, 여인은 흡사 축지법이라도 쓰는 듯 어느새 눈에서 사라졌다. 곧 여인의 집에 도착한 둘은 빠르게 따라오느라 헐떡일 정도였다. 여인은 곧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잠시 몸을 뉘었다가 묘시에 나가시지요. 오늘 인시는 움직이기엔 때가 좋지 않은 듯합니다."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준의 보따리 안에서 날카로운 새소리 마냥 처연한 듯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인도 분명 들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지만 마치 들리지 않는다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행장이는 그 소리를 듣고는 연신 선준의 보따리를 쳐다보았다.
"마음은 감사하나. 갈 길이 멀고 시급한 일이 있소. 그만 가 보겠소. 감사하오. 자야, 가자꾸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곧장 길을 나선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 인시가 시작될 참이었다. 고개를 넘어가 더 이상 여인의 집이 보이지 않자. 선준은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고요한 달 없는 밤은 가끔 풀잎 부딪히는 소리나 작은 산짐승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뿐 적막 그 자체였다.
"자야, 혹시 아까 그 여인네 집에서 수상한 낌새는 못 느꼈느냐?"
행장이도 빠른 걸음으로 걷던 중 선준의 물음에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 아까 저 집에 구미호 아지매 말잉교?"
행장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행장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여인의 뒤에 숨겨져 있는 아홉 개의 꼬리를 못 본건 아니었다.
"너도 보았구나."
선준 역시 그 여인이 구미호인걸 눈치챘지만 그녀에게선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역시 부목산의 신귀사로 가는 길이 급했기에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선준 정도의 기공력과 정신력을 갖추었다면 일이백 년 묵은 구미호를 다루는 건 식은 죽 먹기에 가까웠다.
"근디 그 누님은 구미호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던디요. 그라고 별로 악의도 안 느껴지고 또 아재랑 같이 있어서 든든했구만요."
선준은 두려움은커녕 이런 상황을 웃으며 넘기는 행장이가 대견하기도 했고 측은하기도 했다. 그렇게 급히 고개를 서너 개 더 넘어가자 부목산으로 가는 어귀가 보였다. 시각은 인시에 가까워져 밤의 어둠이 가장 짙어질 무렵이었다.
"행장아, 이제 일 식경만 더 올라가면 신귀사가 나온단다. 폐절이라 아무도 없을 게야. 거기서 할 일이 있다. 널 만나기도 전부터 준비했던 것이지. 그리고 아주 위험할지도 모른다. 자, 이것 받거라."
선준이 행장이의 손에 쥐어준 건 열 냥이 넘는 엽전과 옥으로 만들어진 연꽃의 문양을 가진 매우 고운 노리개였다. 아직 까만 밤이라 노리개의 색상이나 조각 모양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어린 나이의 행장이도 이것들이 얼마나 큰돈이고 값진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아재, 이걸 왜 저한테 준당가요..?"
"행장아, 우선 이걸가지고 산아래로 곧장 내려가면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날 기다리거라."
"아재, 싫구만요. 지도 따라 갈꺼구만요. 와그라는디요? 지는 가면 안되는교?"
"행장아, 너무 위험하다."
행장이는 자기주장이 확실하지만 떼를 쓰거나 쓸 때 없는 고집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벌써 행장이를 한 해를 넘게 봐온 선준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네, 그럼 근처까지 같이 가면 안되요..? 방해가 안되게 절 밖에서 기다릴게요. 아재가 이기면 되는 거 아닝교. 그라고 이거는 도로 가져가시오. 지는 필요 없당게요. 아재랑 있을건디 뭐.."
선준은 이렇게까지 나오는 행장이를 계속 밀어낼 순 없었다. 산골 마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가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때는 안시가 되었던 것이다.
'끼호르르르륵'
선준의 보따리에서 또 흐느끼는 듯 우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선준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신귀사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밤인데다 초행길이었음에도 그는 마치 부목산의 지리에 밝은 듯 거침없이 올라갔다. 행장이도 숨을 헐떡이며 그를 놓칠세라 뒤따라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