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이 필 무렵 2부

왕도깨비

by Rooney Kim

-1년 전, 지옥의 아비규환 이후 한 달이 지난 무렵


선준은 행장이를 지옥이 된 산골에서 구한 뒤 줄곧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선준도 자신의 뜻이 있어 언제까지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한 동안은 행장이를 어디에 맡겨야 할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타닥타닥’


“아재요. 밤이 참으로 잘 익었구만요.”


“그래 자야, 많이 먹거라. 오늘 저녁 참은 이걸로 때워야 하니 니가 다 먹거라.”


“진짜로요? 우와!.. 아니, 그래도 아재도 자셔야 되는 거 아인교.. 지 혼자 먹으면 재미없구만요.”


불과 한 달 전에 부모와 동생 그리고 이웃을 모두 잃고도 그 이후 눈물 한 번 보이지 않은 행장이는 무척이나 특별했다. 보통 아이였으면 지금껏 이렇게 데리고 다니지도 못했을 테다. 아마도 이미 어느 동네 과부댁이나 절간에 맡겼을지도 모른다.


행장이는 한 동안 말 없이 군밤을 까먹기에 바빴다. 다행히, 동네 어귀에 있던 주인 없는 큰 밤나무 몇 개에 있는 밤을 온통 털어온 터라, 배가 터지게 먹고도 남을 만큼의 밤이 쌓여있었다. 이 날도 삭날이라 시각이 흐를수록 밤은 더욱 짙어져 갔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빈 초가집은 문창살도 뜯겨 부서지고 창호지도 벗겨져 여기저기 너덜거렸지만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밤에 이만큼 안전하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게다가 아궁이는 쓸만했고 덕분에 안방에는 온기가 차올라 덩달아 선준과 행장이의 마음도 든든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자야. 자니?”


“아니요. 아재는 안 자는교?”


“등이 따뜻하면 바로 잠이 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런 밤이 낯설구나. 집을 나와 떠돈 지 몇 해가 되다 보니 이런 밤은 너무 호강하는 것 같아 참 어색하단다.”


“지도 그렇구만요. 분명 지난 한가위에는 가족들과 함께 있었는디.. 그땐 차가운 방바닥도 좋았는디 말이지요..”


“행장아..”


“네, 어매, 우짠일로 지 이름을 다 부르시고 그라요? 헤헤.”


“자야, 너네 부모님은 실성하신 게 아니었어.”


“... 지도 알지라.. 왜 갑자기 그 야기를.. 뭣하러 그 야기를 하신당가요..”


“너도 알건 제대로 알아두라는 거야. 네 비록 아직 어리지만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을만큼 똑똑하고, 또, 지금부터 알아둬야 평생 기억할 것 같아서 얘기해주는 거란다. 네 부모님은 미치거나 귀신이 씐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였지. 마을 사람들 몇몇은 필시 악귀에 사로잡혔었단다. 내가 보았고, 일령(日領)이 느꼈지. 관아에서 나졸도 보내지 않고 마을을 버린 것만 봐도 알아. 네 부모님은 너와 네 동생, 가족과 마을을 지키려 했단다. 그것만은 꼭 기억하렴.”


행장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대꾸도 없었다. 돌아누운 행장이의 어깨는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고 선준은 자신의 두루마기로 행장이를 덮어주었다. 행장이는 꾹꾹 울음을 삼키며 깊은 울음을 내뱉고 있었다. 소리 내어 울어도 되는 나이였지만, 행장이는 그날이후로 이미 다 커버렸는지 끝끝내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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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신귀사 입구에 도착한 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폐절이라는 말과는 달리 너무나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미 여러 명의 스님들이 새벽 수양을 위해 대웅전을 들락이고 있었고 몇몇 동자승들은 사찰 내 이곳저곳에서 비를 쓸며 청소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여긴 신귀사가 아닌가..'


예상치도 못한 이곳의 장면에 혼란해하고 있는 선준 앞에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 한 스님이 튀어나오더니 그들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새벽부터 일찍 오셨군요. 저희는 막 새벽 기도와 봉양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혹시 봉양 기도를 드리러 오신게 맞으신지요?"


선준은 여전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얼떨떨한 얼굴로 스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스님, 저희가 간밤에 고개를 열개도 더 넘게 넘어와서 배가 고픈데 혹시 먹을 게 있을랑가요??"


행장이는 선준이 당황해하는 틈을 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스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둘을 백일기도를 드리는 객들이 머물다가는 별채로 안내했다. 공양 기도 준비가 끝나면 산채밥도 가져다준다고 하자 행장이는 신이 났다. 둘은 곧 짐을 풀었고 뜨뜻한 아랫목에서 누워 비비적거리던 행장이는 이내 곯아떨어졌다.


'아무래도 이상해. 어째서 이런 일이..?'


선준은 한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수 년을 찾아 헤매다 결전의 날을 위해 칼을 갈아온 그에게 지금의 현실은 전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도무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길을 잘못 든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다시 언제 기회가 올지 몰랐다. 혹시 내년 백중에 저 악귀들이 저승으로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소천 스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녀석들에 대해 복수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마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스륵. 스스스’


눈을 감고 온갖 잡념에 사로 잡혀있던 선준은 갑작스레 귀를 스치는 예기치 않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방을 안내한 스님은 아랫목을 데워주고 사라진 지 오래고 다른 스님들은 모두 대웅전으로 갔을 무렵이라 누가 별채로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끼익. 끼이익. 쑤우욱’


선준이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던 중 별안간 시커먼 손 하나가 문 아래 틈으로 들어왔다. 이에 선준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행장이를 왼쪽 구석으로 밀어붙이고 그 반동으로 오른쪽으로 구르며 보따리로 손을 뻗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보따리 안에 있던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옥색의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들어온 손은 곧 서너 갈래로 나뉘더니 열개도 넘는 팔이 되어 선준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몸을 휘감아댔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선준은 이런 잡귀의 기습을 아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잡귀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의 힘은 상당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잡귀는 기공력으로 힘을 줘 빼내거나 꺾어버리면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악귀의 팔 하나가 선준의 보따리를 풀어 그 안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이이익-‘


‘끼아아아아아아악-‘


선준의 보따리 안에 손을 집어 넣자마자 시커먼 손의 악귀는 귀가 찢어질 듯 따가운 고통 어린 신음을 토했고, 보따리 안의 손은 순식간에 타오르더니 재가되어 사라졌다. 이에 악귀의 다른 손들이 당황하며 힘이 풀리자, 선준은 보따리에서 나무 칼자루를 하나 꺼내 들고 이를 손에 쥔 채 큰 소리를 외쳤다.


"일령(日領), 광(光)"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던 방은 마치 벼락이라도 내려친 것 마냥 삽시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파지지지지지지직-‘


방 안의 팔과 손들은 일시에 불에 탄 재가 되어 날리며 사라졌고, 선준은 일령을 쥐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런.. 역시, 네 이놈들!”


갑작스런 난리통에 잠이 깬 행장이도 방에서 후다닥 빠져나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둘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신귀사의 풍경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한 식경 전까지 여러 스님으로 밝은 기운이 넘치고 깔끔하게 단정되어있던 신귀사는 온데간데없고 사찰 내 모든 시설과 대웅전은 폐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멀찍이 있는 일주문과 천왕문의 대문은 떨어져 나가거나 달랑거리며 겨우 붙어 있었고, 여기저기 솟아오른 무성한 잡초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그 잡초들 사이로 얼굴이 없는 스님들이 선준과 행장이 있던 별채로 떼를 지어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자야, 내 뒤로 서거라.”


선준은 행장이를 자신의 뒤로 보내고는 마침내 칼자루를 양손으로 쥐었다. 선준의 손 틈 사이로 샛노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재, 무.. 무슨 일인교..? 저 흉측한 것들은 또 뭐 당가요..?”


선준은 행장이를 안전한 곳으로 밀어 붙여놓고 스님으로 둔갑한 귀신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다 일순간 빠르게 달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번쩍하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일령(日領), 기(氣)’


그러자 행장이의 눈에 보이지 않던 칼자루에 다섯 자 길이의 진노란 광채를 띤 칼이 불을 뿜듯 솟아났다. 선준은 스님의 행색을 한 악령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몸을 던지며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그들을 베어나갔다. 마치 찰나의 순간처럼 짧은 시간에 왼편과 오른편으로 현란하게 몸을 옮겨가며 칼질을 해댄 선준은 지치지도 않은 듯 무리의 중앙으로 달려가 그들의 팔과 목을 잘라내고 복부를 찔렀다. 선준의 일령에 잘려나간 악령들은 마치 불에 탄 듯 기묘하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는 회색빛의 재로 변했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치이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일다경(一茶頃)의 반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선준은 스님 행색을 한 악령을 열도 넘게 베어 소멸시켰다. 사실, 그 형체가 타버린 것이라, 부적으로 이를 묶어두지 않는 이상 또 이승의 어디를 떠돌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신귀사에는 다시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선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며 행장이를 찾았지만 주변 어디에도 행장이가 보이지않았다.


“자야, 자야. 어디에 있느냐?”


사찰 내 이곳저곳을 돌며 행장이를 찾던 선준은 마침내 대웅전 앞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는 행장이를 발견했다.


“자야, 게서 뭘 하느냐. 위험하니 내 곁에 있거라.”


선준은 행장이를 불렀지만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웅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수상한 낌새를 느낀 선준은 달려가 행장이의 정신이 들도록 그의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자 행장이가 곧 대답했다.


“아재, 아재, 대웅전에 불상이 없지라. 이상하지 않응교?”


행장이의 눈빛은 낯설게 변해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얼굴은 아니었으나 평소 행장이의 눈빛과는 확연히 달랐다. 혼이 빠진 얼굴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혼이 행장이의 얼굴에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선준은 잠시 불안했지만, 행장이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매우 밝고 선한 것임을 느끼고는 더 이상 행장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재, 불상이 없지라. 여기, 절이 아닝교?”


선준은 한 손에 일령을 꼭 쥐고 대답해주었다.


“자야, 미안하구나. 그래서 널 떼어놓고 오려했건만, 여긴 더 이상 절이 아니란다. 여긴..”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쿵. 콰과과과과과과과과-'


대웅전 안에서 갑작스럽게 엄청난 괴성과 함께 무언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선준과 행장이의 귀를 찢을듯이 때렸다. 선준과 행장이는 본능적으로 대웅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대웅전 안에는 이십 척도 넘어 보이던 불상이 넘어지며 조각나 부서져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뭣이.. 그렇다면 방금 전까지는 불상이 있었나..? 행장이가 불상이 사라질 걸 예측이라도 한 것이란 말인가.’


“아재, 뒤.. 뒤에 조심, 조심하지라.”


갑작스런 행장이의 외침에 마치 대비하기도 전에 선준은 무언가에 붙들려 가볍게 들어 올려지더니 대웅전의 천장까지 끌려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선준은 일령마저 놓치고 말았다. 선준을 끌어올린 것은 십 척도 넘어 보이는 길이에 뱀같이 긴 목과 그보다 훨씬 더 긴 팔을 가진 새카만 형체의 거대 요괴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말로만 들었던 십 척 요괴였다.


"자야, 도망가거라! 어서, 자야!"


선준은 십척 요괴에게 끌려가면서도 행장이를 걱정했다. 선준은 기공력을 잔뜩 끌어모은 양주 먹으로 자신의 몸을 쥐고 있는 십척 요괴의 손과 팔을 수십 차례나 내려쳤지만 요괴는 끄떡하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이랄까, 십 척 요괴에게 끌려가던 선준의 눈에 또 다른 거대한 것이 들어왔다.


‘저, 저건.. 저것마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게다가 하필이면 행장이 뒤에.. 갈수록 태산이구나.. 제길.’


십척 요괴에 붙들려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선준의 눈 앞에, 행장이 뒤로 십 척이 넘는 거인이 엄청난 기운을 뿜으며 서 있었던 것이다. 허름한 복장이었지만 얼굴과 몸에서는 광채가 났고 번뜩이는 눈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송아지 머리만 한 두 주먹은 파란 불꽃이 이글대며 엄청난 기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 순간에 결코 마주하고 싶지않았던 왕도깨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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