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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메시지가 과장된 픽션의 탈을 쓰고 찾아왔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

by Rooney Kim


모든 것은 과장되었다.

삶의 형태도, 행복의 정의도, 머릿속에서나 그려질 것 같은 가족의 형태 역시.


어쩌면 이는,


-아픔의 공감을 더 이끌어내기 위해서?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느껴지는 실제감을 더 도출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걸 알면서도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대리만족 또는 대리수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따라서 방법론과 선택에 대한 관객들의 마음 역시 과장될 수밖에 없다.

요즘 어린아이들의 마음속엔 ‘지지리 궁상으로 살았던 이 꿈의 집을 어른이 돼서 꼭, 꼭 내가 사버리고 만다’와 같은 동기부여는 거의 없을 테니. 그리고..


영화라는 건 필시 평균적인 현실은 확대해석하고 극단적인 현실은 축소각색하여 산출된 극적인 메타포와 처연한 상징이 등장인물별로 난잡하게 뒤섞인 가장 고가의 대중예술미디어니까.



공장장 가족의 삶은 어떨까? 사실,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들은 중산층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요즘 우리 사회가 정의한 부자일리도 없다.


-대궐 같은 3층 집

-넓은 잔디 정원

-바비큐 그릴과 잔디 정원 곁에 마련된 4인용 식탁


어쩌면 이 설정부터 과장되었다. 아니, 어릴 때 꿈꾸던 집을 샀다는 건, 그냥 너무 뻔하니깐.


게다가 이들 삶의 내면은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먹고 산다’의 법칙에 위배되는 ‘아빠가 실직하면 긴축경제와 동시에 엄마도 일하는 그저 평범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0대 후반 이후라는 나이

-평균 20~30년이 넘게 평생 일한 직장에서의 실직

-'전문가, 기술자’라는 자존심과 자기 의심 그리고 타 직종 전직에 대한 무지와 공포 사이에 끼인 번민



아마 위의 현실에 처한 가장이라면 숨통이 조여들고 목구멍이 틀어막혀 시야는 좁아지고 결국, 눈앞이 깜깜해질 것이다.


그래서 배달도 해보고, 마트에서도 일해보고, 평생을 조금 덜 배우거나, 덜 준비한 사람들의 일이라 여겼던 서비스직, 일용직에 뛰어들겠지만, 평생 사무실 밥 또는 공장밥을 먹으며 펜대와 모니터 그리고 루틴화된 업무에 익숙한 몸과 머릿속 만족도의 스펙트럼은 이를 절대, 결코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스펙트럼은 이를 통과시키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이는 마침내, 그 극단적인 자기 합리화를 위한 좋은 땔감이 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듯, 기술자인 나는 기술로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비유가 일맥상통하며 움츠러든 자신을 다시 일깨워주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재확인을 했기 때문에.


그 달램은 곧 자신의 합리화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된다.


이념은 개인의 신념이 되고, 신념은 거대한 에너지원으로 치환된다. 이제 직종변환, 나이 어린 상사, 새로운 환경이라는 불순물은 모두 제거되었다. 새로움에 대한 공포는 더 이상 내 걱정이 아니다. 나는 내가 원래 잘하던 것에 집중하면 되고, 나의 빛나던 어제는 다시 평범한 나의 오늘이 될 수 있기에, 가족과 먹고 뛰놀던 넓은 정원은 계속해서 구현될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이미 ‘실직에 대한 태도’는 틀어졌다.


글러먹었다. 수동태로만 살아온 삶은 능동태가 되기 어렵다. 어쩌면 그들에게 능동태는 사형선고와 같다. 능동태의 방법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게 자신의 스킬이 되기까지는 또 적어도 십 수년의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되고 고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 길은 내 길이 아니야. 난 전문 기술자니까. 내가 뱀을 먹는 순간 난 더 이상 송충이가 아니잖아’의 형태로 변질되어 그의 전두엽은 오직 생존에만 매몰되어 버린 지 오래다.



결국,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


얼마나 극단적인 사고일까 싶지만, 사회는 지금도 이런 메커니즘에 의해 돌아간다. ‘물리적인 살인’만 빼면, 취업도, 이직도, 승진도 결국, 누군가를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고, 자영업과 사업의 성공 역시 해당 시장, 동네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것이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까..?!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분수의 최극단’에서 누리는 중산층의 삶

-다른 직업은 더 이상 생각할 수 도 없는 ‘현생의 처지에 대한 억울함과 운명론적 결심’

-내가 살기 위해, 우리 가족의 중산층스러운 삶을 되찾기 위해, ‘타인을 짓밟을 수밖에 없다’는 폐쇄된 합리성


픽션 같은 삶을 꿈꾸며 살아온 우리에게 툭하고 던져진, 논픽션 같은 메시지가 과장된 픽션의 탈을 쓰고 찾아왔다.


좋다. 서민과 중산층이라는 분수의 경계에서 찰랑거리는 삶과 이를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 시대 ‘인생 아마추어들’의 착각과 상식을 깨버리기엔.


‘어쩔 수 없지만, 지금만큼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이미지 출처

영화 '어쩔수가없다' 공식 페이지 포토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35082739&qvt=0&query=어쩔수가없다%20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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