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룽지 Jul 19. 2023

<애스터로이드 시티>시간은 약이 아니라 반창고야

영화에 대한 단상

영화<애스터로이드 시티> 네이버 포토, 스틸 컷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2023)


스포츠 감동실화 영화 <리바운드>를 보면 시작하기 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라는 안내 자막이 나온다. 간단명료한 이 안내자막은 조금은 뻔할 수 있는 스포츠, 실화라는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아직 재생되지 않은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한국에는 집계된 관객수가 1,299명 뿐인,  조금 생소할 수 있는 <나의 연인에게>라는 영화는 조금 다르다.  검은 화면에 꽤 오래 머물러 있는 하얀 자막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등장인물 및 사건 세부 묘사는 실제와 다릅니다.' 오해없이 이야기를 읽어달라 당부하는듯한 이 자막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로맨스 영화의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감정을 즐기러 온 내게 약간의 긴장감을 준다. 아니다 다를까 아름다운 한 커플의 정체를 꾹꾹 눌러 숨겨내어 진행되는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그들이 911테러사건의 범인, 그리고 그의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 였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그 하얀 자막 덕분에 그들의 정체를 조금 일찍 눈치채긴 했지만 말이다.

 이 처럼 본격적인 관람에 들어가기 전 영화의 정체성을 관객들에게 알리는 것은 감상 중에도 영향을 미치며 해석의 방향을 연출자의 의도대로 잡아주기도 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시작부터 대놓고 해설자가 등장한다. 흑백 그리고 1.33:1 비율의 갑갑함 안에서 티비 프로그램 해설자는 이 프로그램은 연극의 창작 과정이며 실존하지 않는 이야기를 할 것이라며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정체성을 명실히 한다. 또 영화가 진행되는 사이사이 연극의 3막 구조를 일깨워주는 자막을 보여주어 연극이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웨스 앤더슨 스타일'의 작품이 항상 그렇듯 인형극을 보는 것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 부드럽고 사랑스럽지만 무언가 잘 계산되어 삐걱거리는 것 같은 캐릭터들, 화려하게 잘 짜여진 미장센은 실존하는 것이 아닌 잘 짜여진 무대를 보는 것 같다. <개들의 섬> 이나 <판타스틱 Mr.폭스> 같은 애니메이션은 흉내가 아닌 인형극 그 자체를 카메라로 담은 듯한 스톱모션 기법을 사용해 무언가 기이하고 딱딱해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담아낸 깊은 피사계심도의 카메라는 우리를 화면안의 어떤 인물이나 오브제에 동화시키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작중 배우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 처럼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 금기되는 것 중 하나는 이야기안에 빠져 있는 관객을 현실세계로 끄집어 내는 것 이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끊임없이 관객과의 거리를 두며 객관적으로 보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연극이고 픽션이니 실제 이야기인 것 처럼 절대 몰입하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어른들은 희망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쫓는 천문학도 소년, 소녀들 그리고 당찬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른들은 항상 무언가 슬프고, 너무나 현실적이고, 상실한 사람들로 보여진다. 오기 스틴백(제이슨 슈왈츠먼)이 아내를 잃었고 밋지 캠블(스칼렛 요한슨)이 약물로 생을 스스로 마감한 마릴린 먼로를 연상시키는 것 처럼 말이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게임을 하는 아이들과는 다르게 그 둘은 친목을 다져도 서로의 집 안에서 창문을 넘어서 간접적으로만 얘기할 뿐 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 상실 가득한 어른들이 서로 거리를 두며 슬픔을 이겨내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니 이겨낸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시간은 약이 아니라 반창고쯤 되니까 말이다. 살다보면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우리 모두 다른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우리는 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적절한 거리, 오기 스틴백과 밋지 캠블의 창문 너머의 거리처럼. 또 억류되어 떠날 수 없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처럼 우리는 외면할 수도 붙어있을 수도 없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웨스 앤더슨의 '관객에게 거리두기' 연출이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이다.


오기 스틴백이 세트를 박차고 나와 "이 연극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 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맞는 말을 말하고 있는지, 남들이 싫어하지 않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니면 이 '연극'이라는 틀에서 박차고 나가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야하는 건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고독한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억류된 사람들 처럼 적어도 우리는 같은 외계인을 보고 공감하고,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남들과 끊임없이 거리를 둬야한다는 것은 우리가 나약한 존재가 아닌 강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