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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Jul 03. 2022

70대에도 새로운 시작이 있을까?

우리에겐 레퍼런스가 필요해

‘이제는 숨겨둔 자식과 함께 배우자가 동성애자일 경우도 대비해야 돼’


요즘 가장 열심히 보고 있는 넷플릭스 시트콤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보고 한 말이다.


70세를 갓 넘긴 두 부부가 주인공인 드라마의 첫 에피소드는 세상에나, 오랜 동료 관계라 믿었던 남편들이 실은 20년 넘게 동성 불륜 커플이었다는 이야기다.


남겨진 두 부인은 뒤늦게 깨달은 성 정체성을 탓할 뿐 불륜에 대한 원망은 하지도 못한 채 두 부부가 함께 돈을 모아 산 별장, 실은 두 남편의 밀회 장소였던 별장에서 얼레벌레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지극히 화이트 칼라스러운 여성과 지극히 히피스러운 여성이 잘못 조립된 가구처럼 삐그덕 대며 한 집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모험을 하게 되고 함께 사업도 하게 되며 결국 영혼의 동반자가 된다는 이야기. 그야말로 <델마와 루이스>는 저리 가라는 여성 액션 활극 버디 무비(총도 쏘고 좀도둑질도 하고 클럽 테이블에 올라 춤도 추니 이 정도면 액션이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재밌다. 그러니까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손에는 검버섯이   할머니들이 지지고 볶는 이야기에 아직 30대인 내가 깔깔 웃고 있다는 거다. 그것도 (할머니라는) 미지의 어떠한 존재나  엄마나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웃는  아니라 마치  이야기인 것처럼 감정 이입하면서.




만난 지 3년이 된 가또와 나는 40대를 앞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노화에 대해서 부쩍 자주 이야기한다. 노화의 서글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인데 전과 다른 몸의 변화를 맞닥뜨릴 때는 얕은 두려움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지금이 젊음에서 늙음으로 진입하는 시기라서 그렇지 않나 싶다. 마음과 정신은 아직 20대 초반이라고 우겨봐도 관절에서 나는 소리가 다양해지고 흰머리가 늘어가는 걸 외면할 수는 없다. 생뚱맞은 곳에 점이 자꾸 생기기도 한다.


얼마 전엔 교보문고에 갔는데 만화책 코너로 가기 위한 통로일 뿐이었던 건강서적 코너에서 둘 다 발길을 멈추고 책 제목을 살폈다. ‘이건 오빠가 봐야 하고, 이건 내가 봐야겠다’면서 각자의 통증이 있는 부위를 다룬 책을 골랐다. 지난 1년 사이에는 이상하리만치 몸 여기저기가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있는 운동만 했던 나는 최근에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생존 운동이다.


벌써부터 이렇게 몸 여기저기가 아픈데 70살은 어떻게 세상을 사는 거지? 이 의문에서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보기 시작했다. 남은 여생은 진짜 나로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고 싶다는 충격적인 게이 커밍아웃과 이들의 해피엔딩으로 졸지에 나이 70에 이혼한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궁금했던 것이다. 70살에도 새로운 시작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던 노년과 달리 주인공들은 새로운 사랑을 하고 사업도 시작했다. 물론 젊은이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섹스를 할 때는 질액이 충분치 않아 윤활제가 필수이며 사업을 하려고 해도 고령이란 이유로 은행 대출을 거부당한다. 이런 큰 산 앞에서 컴퓨터나 인터넷을 익히는 건 애교 수준이다.


70세가 넘은 그레이스와 프랭키의 이야기를 마치 스무살 때 <섹스 앤 더 시티>를 봤던  느낌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이 드라마가 가족 드라마처럼 보이나 ‘다소 높은’ 선정성을 가진 18세 이상가이기 때문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이 70살이 넘으면 그레이스와 프랭키 같은 느낌일까 상상했다(최근 50대가 된 그녀들의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니 20년 후에 70대가 된 캐리와 미란다를 보는 게 영 말이 안 되지는 않다). 그야말로 이 시트콤은 '도시 외곽 늙은 여성들의 일과 사랑 그리고 우정'을 그대로 담았다.


자식에 손주까지 있는 그레이스와 프랭키에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극 안에서 엄마나 할머니의 역할로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와 할머니는 이들 캐릭터의 배경 중 한 요소일 뿐 이들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위한 장치가 아닌 아이와 손주가 있는 한 여성일 뿐이다. 이들은 사랑을 하고 실연을 하며 사업을 하고 좌절도 한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를 설명해주는 건 모성애가 아닌 마티니와 마리화나다. 흔히 70대의 여성 캐릭터가 연기했던 엄마나 할머니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를 보며 여전히 막연하고 대단히 흐릿하지만 70대의 모습이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말이 많고 기계는 잘 못 다룰 것이다. 뜨개질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사업가 출신에 모든 일에 똑 부러진 그레이스보다는 괴짜스러운 프랭키 같은 할머니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중년의 호칭은 ‘어머님’과 ‘아주머니(사전적 의미는 차치하고서)’로 비교적 다양하지만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로 퉁쳐지는 느낌이다. 노년의 여성은 모두 손주가 있을 거라는 지레짐작이거나 혹은 사회에서 굳이 호칭까지 신경 써야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70대에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레이스와 프랭키 그리고 남편들의 앞을 가로막는 건 단 한 가지다. 바로 건강. 결혼식을 앞두고 심장마비에 걸리거나 생애 최초로 바이브레이터의 기쁨을 알게 됐지만 곧 손목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거나(이를 계기로 노년 여성을 겨냥한 바이브레이터 사업을 시작한다)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을 앞두고 허리를 삐끗한다거나. 역시 삶을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건 건강의 위협인건가. 그러니 아직 '늙었다'고 말하기엔 새파랗게 젊은 30대지만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노화를 무시하고 있을 순 없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게이 커플, 입양 가족, 비혼 여성, 이혼 가정 등 ‘정상가족’이 아닌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 법적으로나 혈연으로나 가족은 아니지만 그들만의 관계를 구축하며 함께 살아가는 그레이스와 프랭키를 보며 70살이 되어서도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가또와의 미래를 그려봤다.


문득 생각해 보니 최근 1년 동안 노년이 주인공인 작품을 꽤나 찾아봤었다. 부부가 모두 치매 판정을 받는 내용의 <로망>, 성폭행 당한 노년 여성의 이야기 <갈매기>, 비슷한 주제의 <69세>, 어느 날 손주라며 찾아온 아이를 키우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 <감쪽같은 그녀>, 노인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살아가는 노년 여성이 주인공인 <죽여주는 여자>, 2회 차를 찍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와 <눈이 부시게>까지. 아마 내 할머니와 엄마와는 다를 것이 분명한 나의 노년이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 작품 안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레퍼런스를 찾지 못했다. ‘늙는 건 겁나지 않아.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도 영화나 드라마 속 노년을 볼 때마다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 뭘 해야 하지?’라는 불안에 떨었다. ’저렇게 늙게 되겠지’ 싶은 캐릭터는 있지만 ‘저렇게 늙었으면 좋겠다’ 생각되는 캐릭터는 없었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보고선 ‘노년에 저렇게 되려면 지금 뭘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얕게 깔린 불안감을 비집고 따뜻한 기운이 일었다. 막연히 ‘귀여운 할머니’로 늙고 싶다고 말해왔었는데 그 귀여운 할머니의 실체를 본 것 같았다. 물론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둘 다 변호사 전남편을 둔 미국 중산층 가정의 고학력 백인 여성들이며 그레이스는 기업가 출신에 프랭키는 화가다. 그러나 꿈꾸지 못할 미래라고 한들 참담한 미래만 있는 것보다는 낫다. 그레이스나 프랭키처럼 해변의 별장에서 지내는 건 아니더라도 70살이 되면 은퇴한 가또와 지방 소도시의 텃밭이 있는 집에서 사는 꿈 정도는 꿀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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