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 다큐멘터리를 봤다
"저는 억울해요. 저희 정말 힘들었는데 이런 걸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고 좀 더 이 일을 한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소속사의 매지니먼트 팀장이 자기 관리 소홀을 지적하자 사쿠라가 한 말이다.
지난 9월 17일 유튜브 채널 하이브 레이블은 여성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은 멤버 개개인의 서사를 연출하고 인터뷰를 통해 발언권을 부여하며 시청자에게 멤버 각각을 각인시킨다. 사람은 한 인간의 노력과 고군분투를 보면 당연하게도 측은지심이 발동해 그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진다. 이런 성장, 감동 다큐멘터리 방식을 차용하는 하이브의 영악한 마케팅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해 다큐에서는 소속사와 르세라핌의 갈등 구조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소속사가 악을 자처함으로써 르세라핌이 선의 위치에 서게 한다. 이런 악역을 담당하기 위해 소속사는 르세라핌의 자기 관리 소홀을 지적한다.
여기서도 박수를 탁 치게 하는 지점이 있다. 데뷔를 앞둔 아이돌의 첫 단체 촬영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실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제작자의 눈에 미흡해 보이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굳이 이 상황에서 자기 관리를 언급한다. 이 상황을 지켜본 팬이라면 '살이 좀 찌면 어때!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가수가 무대를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고 만다. 소속사는 본인들이 르세라핌의 몸매를 지적함으로써 팬들 심리에 쿠션을 만든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소속사에서 사용한 언어다.
'아티스트가 활동할 때 필요한 자기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알 텐데 내 생각에 (지금의 모습이) 100%는 아니다.'
이런 가스라이팅이 있나. 그리고 여기에 정점을 찍는다.
'자기 관리는 결국 자기가 해야 한다'
그가 생각하는 자기 관리와 내가 생각하는 자기 관리는 다른 것이었나 보다. 자기 관리를 '건강'으로 생각했던 나와 이를 '카메라빨이 잘 받는 마른 몸매'로 생각했던 그의 차이다. 그의 대화에서 '자기 관리'를 '몸매 관리'로 바꾼다면 의미가 더 명확해질 것이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막대한 돈을 투자해 키우는 소속 아이돌이 '상품'으로서 제대로 된 가치를 갖길 원한다. 다만 그들이 '살 빼' '체중 줄여'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본인들도 타인의 체형에 있어 함부로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알고 있음에도 자신들이 키운 아이돌이 말랐으면 하는 마음, 이 마음을 '자기 관리'라는 단어에 담아 교묘하게 책임을 전가한다.
가수, 아이돌이 되기 위해 타고나야 하는 것들이 있다. 노래, 춤,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등 노력해서 바뀔 수 있는 것들이지만 노력만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재능. 몸도 똑같다. 노력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노력만으로 안 되는 부분도 있다. 다만 실력을 쌓기 위한 방법이 열심히 연습을 하는 것인데 반해 마르기 위해서는 굶어야 한다. 기본권의 침해다.
르세라핌의 다큐멘터리 'The world is my oyster'는 세계 각지에 있던 멤버들이 제각각 어떠한 욕망을 품고 한국으로 와 연습생 생활을 버티고 있는지에 대해 촘촘히 다룬다. 인생의 대부분을 발레만 했던 카즈하와 일본에서 정상급 아이돌 자리에 있던 사쿠라, 아직 풋풋한 1년 차 연습생인 홍은채와 사쿠라와 함께 이미 아이즈원으로 아이돌 데뷔를 했던 김채원 그리고 연습생을 그만두고 미국에서 평범한 학생으로서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다른 가능성을 꿈꿨던 허윤진. 모두 제 발로 연습생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소속사는 하나의 명분이 얻는다.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하니 그 외 것들은 감수하라는 풍조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조차 혜택으로 여겨야 하는, 녹록지 않은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 아이돌의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일, 그렇지만 기업에게는 원하는 직군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 노동 착취 혹은 인권 침해의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다.
르세라핌의 멤버들은 아이돌이 되기 위해 수년 동안 연습해 왔다. 물론 성공한 아이돌은 인기와 부는 물론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을 수 있는 게 지금의 K-POP 아이돌의 위치지만 성공으로 가기 위한 문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이 문턱을 넘기 위해 이들은 아침 7시 반에 출근해 하루에 최소 7시간은 안무 연습을 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한다. 이들에게 식사란 곧 연습을 하기 위한 에너지원이다. 그럼에도 과도한 일정으로 인해 잠을 충분히 못 잔다는 아이돌에게는 연민이 생기는 반면 먹고 싶은 걸 못 먹는다는 아이돌에게는 '당연하지. 아이돌이 자기 관리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지 우리 모두 생각해 봐야 한다.
샌드위치로 식사를 때우는 이들에게 안무 강사는 더 파워풀하게 춤을 추라 말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 관리를 하라고 말한다. '어쩜 저렇게 말랐지?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품고 다큐를 보던 내게 연습실에 앉아 식사로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은 충격이었고 자기 관리를 더 '타이트'하게 하라는 팀장의 말은 더 큰 충격이었다. '저 아이들에겐 질 좋은 영양분과 충분한 잠이 필요해!'
사랑받아야만 무대에 계속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아이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외모는 어쩌면 춤과 노래만큼 중요할 수도 있다. 혹은 실력을 쌓으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단 연예계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건 단순히 실력이 있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는 시대다. 수명이 짧은 아이돌에게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것만으로도 높아지는 실력과는 반비례하게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불안에 떨 수도 있다. (르세라핌이 소속된 쏘스 뮤직은 소속 그룹 '여자 친구'를 하루아침에 해체시켜 논란이 된 바 있다.)
인간에겐 타고난 체형이라는 게 있고 체중은 호르몬과 세포의 영향 등 노력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복잡한 신체 요소다. 의지를 갖는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자기 관리를 지적받은 르세라핌의 멤버 허윤진은 말한다.
"팀을 위해서 개인의 의지가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