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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Jul 06. 2022

아빠는 살쪘다고 인사했다

살이 찌는 게 싫으면 섭식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것일까? 



1년 만에 아빠를 만났다. 그다지 애틋한 관계도 아니고 직장 생활을 한 후로는 명절에나 겨우 집에 얼굴을 내비쳤기에 1년 만에 만난 건 그냥 조금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여전히 기분대로 사람을 대하는 아빠는 이번엔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의 기분이었나 보다. 그렇게 아빠는 인사를 건넸다. 


"너는 살이 좀 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무신경한 바디 토크를 어느 정도 흘려듣거나 혹은 그대로 되받아 치며 넘겼지만 가족이 건네는 몸에 대한 말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저것은 인사치레일까 진심일까. 언제나 가족이 가장 큰 상처를 준다. 무심하게 던지는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들. 혹은 가족이기에 말의 무게가 크게 다가오는 것일까.  


섭식장애가 호전된 이후로 내 체중은 꽤 늘었다. 체중을 재 본 건 아니지만 거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두꺼워진 배와 맞붙은 양쪽 허벅지. 그런데 괜찮았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던 장벽처럼 살이 찌는 것에 대한 공포는 내 안에서 오랫동안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공포는 지금의 파트너와 동거를 시작한 후 사라졌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의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밥 다운 밥을 먹고, 먹는 것에 대한 행복을 알아가며 음식은 더 이상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행복하게 나는 살이 쪘다.  


살이 쪘다는 아빠의 인사를 듣곤 몇 초 정도 멍해있던 것 갔다. 그리고 물었다. ‘살 빼야 될까?’ 내 물음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손사래를 쳤다. ‘보기 좋다는 얘기야. 무슨 살을 빼.’ 나는 안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는 살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살을 좀 빼야 하나? 아니야 난 살찌지 않았어. 부족한 근육만 좀 붙이면 될 거야. 근데 지방이 좀 많은 편인가? 역시 살을 좀 빼야 하나? 이렇게 맨날 밥을 많이 먹으면 앞으로는 점점 찌기만 하게 될까?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어디까지 찌는 거지?’ 나는 그 길로 필라테스 수강권을 끊었다. 


60만 원이 넘는 수강료를 카드로 결제하며 ‘이게 맞나’ 싶었다. 내가 필라테스를 하고 싶어 했나? 살을 빼고 싶기는 한 건가? 나는 아직도 살이 찌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지난 몇 년간 나는 내 체형이 어떠하든 상관없었다. 섭식장애를 극복한 사람의 체형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기대하던 나는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먹었고 때에 따라 살이 찌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가 출간된 후 어떤 인터뷰에서는 기자가 혹시 마른 체형이냐고 묻더니 체구가 커 보이게 입길 요청했다. 나는 마르진 않았지만 작다고 했고 오버사이즈의 코트를 입고 가겠노라고 했다.  


아빠의 말을 듣고 난 후 살이 점점 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으면서 덮어놓고 있던 사실들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게 중요했다. 살이 찐 감각이 예민하게 나를 파고들었다.  


걸을 때마다 살이 스치는 감각, 바지의 허리 밴드가 뱃살에 파고드는 느낌, 겹치는 옆구리살과 살끼리 맞닿아 만들어 내는 온도, 옷 안을 꽉 채우는 부피감, 숨을 쉴 때마다 더 타이트하게 조이는 원단, 걸을 때마다 사타구니를 조이는 바지 밑위의 봉제선, 않을 때 허벅지를  조여드는 바지의 감각, 그 위로 닿는 뱃살.  


살이 찐 게 싫어졌다.


몸을 이루는 뼈와 장기는 그대로인데 살덩어리들만 늘어났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옷을 입을 때는 옷은 그대로인데 욱여넣어야 하는 살이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아빠의 말은 트리거였다. 갑자기 나는 그냥 사람에서 살이 찐 사람이 됐다. 


물론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 점점 몰입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는 조금은 유연해졌나 보다. 아니면 필라테스 36회 권을 한 번에 결제하는 순간 앞으로 값아야 할 카드 할부금에 정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필라테스 때문인 건 맞다. 


필라테스를 하러 간 첫날, 거울 속 살찐 내 모습을 보며 부끄러운 마음이 잠시 일었지만 수업이 시작되며 그 마음을 깡그리 사라졌다. 처음으로 해 본 필라테스의 운동 강도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강사의 말에 들으며 내 몸 구석구석의 근육에 집중하면서 동작을 따라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살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나는 강도 높은 필라테스 동작을 할 수 있나. 내 몸은 험난한 삶을 버텨낼 만큼 강인하나.  


아빠는 잘못된 인사를 건넸다. 살이 찌는 건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그 감각을 느끼는 사람은 온전히 나다. 살을 뺄 필요성을 느끼는 것도 나고 살을 빼는 것도 나다. 타인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게 설령 가족이라도.


나는 여전히 살찌는 것이 싫다. 치맥을 하고 떡볶이를 먹으면서 살이 쪄가고 있음에도 살이 찌는 그 감각이 싫다. 그런데 무섭지는 않다. 내게 일어나는 불행이 다 내가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괜찮다. 살이 찌는 것도 괜찮다.


나는 섭식장애를 극복했고 여전히 살이 찌는 건 싫지만 살이 쪄도 괜찮다. 그리고 맛있게 음식을 먹고 적당히 운동한다. 


이번 휴가에서는 처음으로 수영복을 입어볼 생각이다. 택배로 온 파란 깅엄 체크의 수영복을 입어보니 납작한 가슴에 굴곡 없는 허리, 튀어나온 엉덩이 살에 깜짝 놀랐지만 뭐 이게 내 몸인 걸 어쩌겠나. 옷으로 장식하기 위한 몸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기능해야 하는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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