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에세이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핑크색 폴더폰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부쉈던 핸드폰. 요즘의 스마트폰과는 다르게 손바닥 위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였다. 패리스 힐튼을 싫어했던 나는 핑크색도 싫어할 게 마땅한데 왜 핑크색 핸드폰을 샀을까? 아마 누군가에게 작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었나 보다.
스물두 살 시드니에서 시작했다. 첫 연애 말이다. 딱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모른 채 30년 넘게 살았으니 아마 그때도 사랑은 아니었을 거다. 그건 소유욕에 가까웠다. 쇼윈도의 옷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구차하고 야비하게 그를 가졌다. 폴더폰을 두 동강 내면서 말이다.
가장 놀란 건 나였다. 그건 아빠가 하던 행동이었다. 술을 마신 아빠는 사람을 부수진 않았지만, 종종 물건을 부쉈다. 가장 자주 피해를 본 건 리모컨이었다. 어느 날 낯선 리모컨이 보이면 그건 아빠가 또 리모컨을 집어 던졌다는 뜻이었다. 제대로 화를 낼 줄 몰라 고작 리모컨에나 화풀이를 해대는 아빠가 한심했다. 그리고 그런 한심함을 빼다 박은 건 바로 나였다.
처음으로 마주한 제 폭력성에 놀라워한 것도 잠시 이내 화가 해소되는 걸 느꼈다. 폭력은 아주 손쉬운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물건은 다시 사면 그만이다. (물론 핸드폰 단말기를 6만 원 정도에 살 수 있었을 때 말이다) 내 영악한 폭력성은 짧은 시간에도 물건의 가격을 스캔하는 재능을 발휘했다.
유학 생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의 삶이 마음을 허하게 하고 그 허한 마음으로 나쁜 것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리라. 한국에서와 다른 내 모습을 설명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감정을 교류하는 이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티 내고 싶었던 걸까? 상대가 알아주길 바란 걸까? 내가 화났다는 것을, 무언가를 부숴버릴 정도로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을, 그러니 헤아려주라고, 도와달라고.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물건을 부술 정도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건 PMS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폭력성을, 이성을 잃을 만큼 동요하는 감정의 파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다. 아니 어쩌면 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PMS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나는 내 증상이 PMS임을 단박에 알아챘으니까.
대물림 된 저주라고 생각한 폭력성은 그저 호르몬의 농간이었다. 감정을 분출하는 가풍(?)과 충동에 약한 기질이 PMS와 겹치면서 감정을 과격하게 표현했다. 다만 20대의 나는 대체로 화가 난 상태였기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현됐을 뿐이다. 핸드폰을 박살 냈던 날, 불현듯 내재된 폭력성이 고개를 들었던 걸까? 아니다. 핸드폰에 화를 내기 전 나는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스스로를 부쉈다. 섭식장애의 형태로.
_'제가 아니고요, PMS예요!' 중에서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는 한동안 서점을 오픈하기 위해 바쁘게 보냈습니다. 지난 4월 해방촌에 서점을 오픈한 후로는 운영에 집중하느라 글을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 좋은 글을 내놓고 싶은 마음에 여러 작가님들의 글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게 됐습니다.
<제가 아니고요, PMS예요!>는 PMS에 대한 12명의 이야기를 엮은 앤쏠로지입니다. 현재 텀블벅에서 펀딩 중으로 가장 빠르게는 10월 18-20일에 열리는 퍼블리셔스 테이블 북페어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link.tumblbug.com/hy8ssbGOuNb
지난 몇 달 동안 밀리의 서재 내 밀리 로드에 연재를 하게 되어 브런치에는 글을 못 쓸 여유가 없었는데요. 꾸준한 창작 활동을 위해 브런치에도 곧 연재를 재개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