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라진 세대다
전 직장은 직원 평균연령이 26세인 스타트업이었다. 당시 대표의 나이도 20대 후반이었다. MZ세대가 이끄는 회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5년생인 나는 선배들이 즐비한 기성 회사에서 나와 드디어 내 아이디어를 소리 낼 수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평균 연령 26세, MZ가 이끄는 회사에서 85년생인 나는 주류가 아니었다. 밀레니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늙은 밀레니얼이었다.
대한민국의 밀레니얼, 그중 밀레니얼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좀 많나? 싶은 세대는 좀 억울하다.
밀레니얼 세대라는 자각 없이 MZ로 뭉뚱그려져서 공감가지 않는 인식 속에서 이게 내 이야기가 맞나? 하며 얼떨떨한 기분인 채로 이제 중년의 문턱에 발을 얹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대체, 왜 갑자기 날 밀레니얼 세대래? 이게 다 X세대 때문이다. 90년대 대한민국의 유행을 선도하며 '대학생 때는 노는 거 아니야?'라는 물음이 가능한 시대에 어쨌든 취업들은 해 2008년 금융위기 전 커리어적으로 뭐 하나 성과는 내 봤던 사람들. 이를 발판으로 회사의 차장, 부장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 자신들과는 뭐 하나 (당연하게도) 같은 게 없는 신입 사원들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요즘 애들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에 대한 응답으로 한국식 MZ세대가 정의 내려졌기 때문이다.
밀레니얼과 젠지의 합성어 MZ의 M, 밀레니얼 세대는 미국에서 건너온 개념으로 닐 하우와 윌리엄 스트라우스가 <세대들, 미국 미래의 역사>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책에서는 밀레니얼 세대를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큰 범주의 세대를 지칭한다. 이들을 묶을 수 있는 금융위기를 겪었으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즉 스마트폰 이전과 이후를 모두 겪은 세대라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 세대를 일컫는 젠지Gen Z 세대와 중첩되는 통에 지금은 MZ세대로 퉁쳐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IMF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던 90년대를 겪었으며 싸이월드에서 놀았던 한국의 80년대생을 90년대생과 같이 묶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니까 미국의 세대 개념을 그대로 대한민국에 적용하며 생긴 누락된 세대가 있다는 말이다.
그 세대는 바로 밀레니얼 중에서도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이들은 밀레니얼 세대의 감성을 느껴본 적도 없으면서 미디어에 의해 MZ라는 단어로 납작해진 세대다.
자신이 이 늙은 밀레니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힌트는 ‘Y2K’ 패션을 멋진 복고 트렌드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다. Y2K패션은 IMF를 겪은 늙은 밀레니얼에게는 90년대 후반 세기말의 우중충한 사회 분위기와 약에 취한 듯한 테크노에 점철된 기괴한 문화로 기억되기에 당시의 패션을 그저 돌아온 트렌드로 소비하기에 거부감이 생긴다. 이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대는 팬데믹 동안 <프렌즈>나 <클루리스> 등 90년대 미드와 영화를 보며 각색된 미국의 90년대를 소비한 젠지 세대일 뿐이다.
늙은 밀레니얼을 나누는 힌트는 또 있다. HOT와 빅뱅의 사이에 끼인 세대라는 것이다. 1세대 아이돌로 90년대를 호령했던 HOT의 멤버는 1978년에서 1980년생까지로 오렌지족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당시에는 아이돌 그룹을 구성할 때 오렌지족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이민 2세나 유학생을 꼭 1명씩 넣었는데 HOT에도 그 역할을 하는 토니 안이 있다. 이들의 은퇴 후 아이돌 암흑기를 지나 빅뱅이 인기를 얻으며 2세대 아이돌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데뷔 당시 빅뱅 멤버들의 출생 연도는 1987년에서 1990년까지로 이들을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에 부합하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늙은 밀레니얼은 문화의 주류가 돼 보지도 못한 세대라는 얘기다. 언니를 따라 오렌지족 아이돌을 좋아하거나 20대가 훌쩍 지나 늦덕이 되어 2,3세대 아이돌 문화에 빠진 이들이 바로 늙은 밀레니얼이다.
늙은 밀레니얼은 ‘요즘 것들’이라 불리는 MZ세대를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없다. 쿠팡플레이 <SNL>의 코너 ‘MZ오피스’에 출연하며 화제가 된 이어폰을 낀 채 근무하는 신입사원이나 이를 보고 당당하게 이어폰을 빼라고 말하는 ‘젊은 꼰대’, 둘 중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대입할 수 없다. 늙은 밀레니얼에게 근무 시 이어폰을 끼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고 이렇게 행동하는 후배를 지적할 때는 ‘시대가 변해서 저런 일은 당연한 건가? 내가 꼰대가 된 건가?’라며 자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늙은 밀레니얼은 기존의 문법대로 까라면 까면서 기성 사회에 순응적으로 적응하면서도 저런 기성세대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한 세대다.
586세대, X세대, Y세대, 밀레니얼 세대, 젠지 세대, 알파 세대 등 역사적으로 출생 연도에 따라 인간은 분류되고 기호화되었지만 애석하게도 이 늙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꼭 맞게 붙여졌던 이름은 ‘88만 원 세대’뿐이었다. 조한혜정은 <IMF 목격한 불행한 청년들 ‘88만 원 세대’ 우리가 껴안자>에서 이들을 ‘너희는 고생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88만 원 세대’는 어린 나이에 IMF 금융위기 급보를 접하고 일찍이 암울한 미래가 온다는 것을 감지한 ‘불안’ 세대’다’고 했다.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만 채워진 세대도 없을 거다.
이런 간극 사이에서 늙은 밀레니얼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낀 세대’라 여긴다. 그러나 낀 세대라는 용어조차 ‘꼰대와 요즘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과거의 X세대이자 현재의 40대에게 빼앗겼다. 껴있다고 서럽다고 말하지도 못한 채 MZ로 불리며 그 어떤 존재감도 드러내지 못한 게 바로 늙은 밀레니얼이다.
여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태생이 88만 원 세대로 가난하기 그지없는 이 세대는 경제력이 없다. 소비 경제에서 소외당한 채 어떤 시장에서도 주목한 적이 없다. 소비 시장에서도 한 번도 이들을 타깃으로 삼은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낮은 경제력을 가진 이들은 월급으로만 먹고살기는 힘들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가상화폐에 빠져들었다. 이는 유연한 사고로 새로운 수익 모델을 일궈 디지털 노마드나 N잡러가 되기에는 굳은 뇌를 가진 늙은 밀레니얼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재테크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인 이 가난한 늙은 밀레니얼은 저출산의 주범으로 공격당하기도 십상이다. 고용불안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며 이제야 숨통 좀 트이나 했더니 이제는 빨리 아이를 낳아 양육 노동에 삶을 내던지라 강요당한다. 이제야 드디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이들에게 삶을 다시 각박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출산의 여정은 의무가 아닌 선택의 영역일 뿐이다.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라는 말도 하지 않나.
늙은 밀레니얼은 대퇴사의 시대에 여전히 장기근속을 하며 재테크에 열을 올리며 노후 준비를 하며 산다. 그래프의 상승하강 곡선에 인생을 맡긴 채 혹시 모를 로또 당첨에 월급의 일부를 내어주며 불안 속에서 밝은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늙은 밀레니얼을 주류 시장으로 올려달라! 주목해 달라!’ 혹은 ‘늙은 밀레니얼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라!’는 건 아니다. 어쩌겠는가? 시대의 모진 풍파 속에서 이렇게 된 것을. 이제는 또 알파 세대가 온다기에 그저 사라진 세대인 우리가 있음을, 고용 불안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며 불안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