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보다 진한 여자들 우정
몇 달간 가슴과 머리를 휘몰아치게 했던 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기어이 끝났다.
OTT의 시대에서 본방 사수를 위해 TV를 본 건 실로 오랜만이다. 전 에피소드 공개가 익숙해져 버린 탓에 일주일 2회 분량이 감질날 법도 한데 <작은 아씨들>의 그 복잡한 인물 관계와 파격적인 스토리는 소화시키는 데도 딱 일주일 만큼이 걸렸다.
<작은 아씨들>은 미국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원작으로 출간한 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영화나 연극 등으로 제작되고 있다. tvN <작은 아씨들>도 그중 하나. 19세기 미국 전쟁 통의 소설이 시대를 막론하고 재해석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시대를 관통하는 배경과 인물 때문이다.
각자의 꿈을 가진 가난한 집안의 자매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현대로 시대를 옮긴 만큼 원작의 뼈대를 유지한 기존 영화화 작품과는 많은 부분 달랐다.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만큼 자매들에게 덮치는 고난과 위험도 더욱 매서웠다. 700억의 비자금과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난초 거기다 한국 정재계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의 출현까지.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그 파격적인 설정과 같이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 보여준 여성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인물을 보여준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납작한 구도는 그냥 거르는 설정.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인물, 무력을 겸비한 잔인한 악역, 권력의 실세까지 모두 여성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700억이라는 큰돈을 훔친 경리, 추자현이 연기한 진화영이다. 그는 주인공 오인주를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인물이며 사건에 종지부를 찍는 인물이기도 하다. 목숨까지 내놓은 것처럼 보이는 오인주의 행동은 언뜻 700억에 대한 소유욕으로 보이지만 그 동력의 기저에는 진화영에 대한 깊은 우정이 깔려있다.
원작에서와 같이 둘째 오인경은 강직한 성격으로 시대의 흐름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정의를 추구한다. 원작에서 첫째인 메그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인생의 가시밭길로 들어설 각오를 하는 비교적 수동적인 캐릭터다. 지금까지의 작품에서는 진보적 여성을 그린 둘째가 독자 혹은 관람객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그때 그 시대에 필요해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의 구현보다 중요한 게 있는 모양이다. 바로 타인을 아끼는 마음. 이타심. 원작과 달리 첫째 오인주가 주인공인 이유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는 첫째의 사랑이 우정으로 치환됐다. 오인주는 우정을 위해서라면 인생을 가시밭길로 내던질 수도 있는 사람인 거다.
오인주와 진화영에겐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사내 왕따라는 점.
친구는 나의 수준을 나타내 주는 거울이어야 하기에 예쁜 아이 옆에는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친구는 거울임과 동시에 바로 옆에서 나를 더 돋보이게 해줘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예쁜 아이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은 이들은 친구라는 관계의 계약을 한다.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에서도 지겹게도 봐 왔던 관계 설정이다.
이런 이들이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도 무리에 끼워주지 않는 이가 있는데 그건 바로 가난한 사람이다.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많은 영화는 이렇게 무리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괴롭힘 당하는 캔디형 여자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에 서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는 작품 소개와 같이 영화는 하이틴 영화의 구도를 그대로 차용하며 시작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기존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왕따처럼 보였던 주인공 오인주에게는 비밀 친구가 있었다. 자신처럼 왕따이면서도 그까짓 것 관심은 1도 없다는 듯 도도한 태도의 진화영.
그는 오인주에게 있어 때로는 말동무, 때로는 선배였으며 죽음 후에는 재산을 상속하기까지 하며 부모로서의 역할까지 한다. 오인주 또한 진화영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단 한 사람이었으며 죽음 이후에도 진화영의 죽음을 파헤치며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오던 여성 캐릭터 간의 관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는 흔히 여성 버디 영화하면 떠올리는 <델마와 루이스>와도 결이 다르다.
여자 둘이 모이면 한 명은 어리석고 미련해야 하며 이로 인해 둘은 함께 파멸을 맞는다. 지금까지 답습해 오던 여자의 우정이며 여성 캐릭터의 한계였다. 오인주와 진화영은 영악하게 주변 인물을 이용하고 힘 앞에 굽히지 않으며 끝내 서로를 구원한다. 죽은 줄 알았던 진화영이 살아서 돌아왔을 때의 그 짜릿함이라니. 오인주가 집요하게 사건에 파고들었던 것, 죽음을 위장했던 진화영이 돌아와 법 앞에서 사건의 진위를 밝혔던 것 모두 이 둘이 서로 아끼는 마음, 바로 우정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의리 따위로는 낼 수 없는 용기다.
원작에서 첫째가 추구하던 사랑을 우정으로 치환했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하다. 오인주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우정을 지키고 사람을 구한다. 작은 아씨들 자체의 진화다.
여성이 쓴,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을 위한 드라마인 <작은 아씨들>은 기존 드라마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사랑에 목매지 않는, 판타지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여성도 아닌 판을 짜고 판을 깨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연대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재미있고 신명 나는 드라마. 어쩌면 작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아씨들>을 보고 자란 작은 여성(Little women)들은 큰 변화(Big change)를 이야기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