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트릭스가 우는 게 싫다고 했다
트릭스가 울었다. 그렇게 강해 보이던 트릭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엠넷이 춤 바람을 일으켰다. 지난해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는 신드롬에 가까운 기염을 토해냈다. SNS 상의 댄스 챌린지는 물론 가수의 무대를 꾸며주었던 댄서가 이제는 광고의 모델로, 음원을 낼 만큼 댄스의 위상이 높아졌다. 1년이 지나 댄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시들시들해질 무렵 엠넷은 다시 남성 댄서들을 내세워 느슨해진 방송가에 긴장감을 주고자 했다. 그 특유의 악마의 편집과 경쟁 구도 또한 업그레이드 시켜.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잡음 속에서도 방송에 출연한 댄서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춘다.
트릭스는 '스맨파'에 출연한 크럼프 댄스팀 '프라임 킹즈'의 리더다. 크럼프는 1990년대 후반 시작된 스트리트 댄스의 한 장르로 마치 싸움을 하는 듯한 격렬한 움직임이 특징이다. 팔을 휘두르는 동작이 주를 이루는 크럼프는 배틀에서 상대에게 위협적인 에너지를 표출하며 분위기를 압도한다. 이렇듯 크럼프에서 중요한 건 좌중을 압도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크럼프에서의 에너지는 단순히 동작만이 아닌 댄서가 가진 태도와 눈빛 그리고 몸집에서도 뿜어져 나온다. 크럼프 댄서들은 더 멋진 동작을 위해 터프한 사람을 연기해 왔다.
프라임 킹즈라는 그룹을 처음 모니터로 봤을 때 우리는 그들을 남성적이고 위협적인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다. 필시 방송국에서 그들에게 요구한 이미지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을 거다. 터프한 장르 크럼프를 추는 강한 남자들.
강력한 우승 후보로 예상됐던 것과 달리 지난 5화에서 프라임 킹즈는 스맨파의 첫 번째 탈락 팀이 됐다. 탈락의 당락을 결정지었던 것은 탈락 배틀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올라온 트릭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 춤을 췄다. 그의 몸짓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은 모니터를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그 간절한 몸짓은 대본과 편집으로는 만들 수 없는 트릭스 자신의 것이었다.
프라임 킹즈의 탈락 후 트릭스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었다. 그의 눈물에 함께 마음 아파하며 눈물이 나오려 할 때쯤 함께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동거인은 한 마디 했다. '남자들이 왜 이렇게 울어.'
눈물은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의 하나다. 남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의 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맨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맨박스는 눈물을 보이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남자다움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말한다.'
그는 남성이 눈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습되어온 결과라 말한다. 그조차 딸이 울 때는 위로를 하고 아들이 울 때는 '사내놈이 그렇게 우는 거 아니다'라며 윽박을 질렀다고. 남성의 눈물이 허용되는 건 태어난 후 몇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후부터는 눈물을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게 된다. 물론 남성의 눈물을 멋지게 포장하려는 시도는 몇몇 있었다.
영화 <우는 남자>는 원빈 주연의 <아저씨>를 감독했던 이정범 감독의 작품이다. 그의 필모를 살펴보자면 감독했던 작품의 제목에 모두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열혈남아> <아저씨> <우는 남자>. 직업을 지칭하는 <악질경찰>도 있지만 검은 슈트에 인상을 쓴 채 이선균이 삐딱하게 서 있는 포스터를 보자면 이 또한 악질의 남성 경찰을 지칭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직하고 강한 그리고 폭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주연인 그의 영화에서 우는 남자란 죗값을 치르는 남자를 의미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주인공은 울지 않는다. 의도하지 않은 살인에 대한 죄책감에 죽음을 택한 남자의 마음을 그저 우는 것이라 상징한 것이다.
네이버 검색창에 '우는 남자'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가슴으로 우는 남자'가 뜨는데 그만큼 남자에게 눈물이란 숨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죽거나 혹은 가슴으로 울거나.
어떤 감정은 눈물을 흘려야만 해소된다. 슬픔이나 두려움, 불안과 공포. 타인의 앞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해 끄윽끄윽 소리를 내고 있게 될 때 누군가는 꼭 '그냥 시원하게 펑펑 울어'라고 말한다. 그 허용의 말에 수문이 열리듯 눈물은 폭포수처럼 흘러나온다.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도 감정은 해소된 기분이 된다. 실제로 감정에 의한 눈물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카테콜아민의 함량이 세 배 정도 높다고 한다.
나는 동거인과 3년 넘게 살면서 그가 우는 걸 2번 정도 봤다. 정작 본인은 만취해 흘린 눈물이라 운 걸로 치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동거인이 우는 게 좋았다. 말수가 적고 감정의 폭이 좁은 그가 눈물을 흘렸을 때 나는 그제야 프레임 밖의 그를 본 듯 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 양보하지 않고 대치 중이었는데 그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선 결국 내가 양보하게 됐다. 눈물 앞에서 약해졌나 하면 그건 아니다. 우리가 대치 중이던 그 문제가 그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가감 없이 내보일 정도의 사안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토니 포터는 '어린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감정을 표현할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정해진 성별의 틀과 기대치에 끼워 맞춰 감정을 표현하라고 가르치다 보면 성인이 되어서도 학습된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인 가정에서 자란 동거인은 어릴 때부터 눈물은 참아야 하는 것으로 학습했다. 3형제의 막내인 그는 여자 형제가 있는 가정보다 울음 자체를 희박하게 보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 그, 무해하지만 유익하지도 않은 내 동거인이 봤을 때 탈락 배틀 후 우는 트릭스는 참아야 하는 눈물을 통제하지 못하고 기어이 흘리다 못해 울음을 터뜨려 버리는 보기 좋지 않은 남자일 수도 있다.
나는 프라임 킹즈가 우는 게 좋았다. 그들의 간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춤이 좋아 자신의 인생을 춤에 건 사람들. 주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기 어렵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으며 정년도 짧은 이 일을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하는 그들의 마음이 눈물로 인해 더 진하게 전해졌다. 배틀에서 온몸이 부서져라 춤을 췄음에도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만 한 트릭스의 눈물은 그가 댄서로서 지금껏 흘린 땀만큼이나 값짐이 분명하다.
트릭스는 탈락 후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미처 보여주지 못한 메가 크루 무대를 선보였고 영상은 하루 만에 조회 수 100만 회를 가뿐히 넘겼다. 대중에게 신랄한 평가를 받았던 계급 미션 안무 영상은 위트 있는 제목과 함께 업로드하며 결과에 대한 후회보다는 이 모든 과정을 즐기는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는 사람이 약한 사람이 아니다. 울지도 못하는 사람이 약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