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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욱 Mar 29. 2023

안녕, 롤랑바르트

롤랑바르트를 통해 바라본 나

  “안녕"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린 “안녕"이라고 말한다. 여러 단어 중 왜 ‘안녕'이 인사말이 되었을까. 


 '안녕'은 ‘평안할 안()'과 ‘평안할 녕()'이 만난 단어이다. 두 글자가 모두 평안함을 의미한다. 

 

평안하다: (형용사) 걱정이나 탈이 없다. 또는 무사히 잘 있다.

 

  표준 국어대사전에서 ‘평안하다'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무런 탈이 없으려면 부족함도 지나침도 없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부족함이나 지나침 없이 무사한 시간을 빌어주는 것이 서로에게 최고의 인사였을까?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김풍기 교수에 따르면 근대 이전, 해방 이전 자료에서 “안녕”이라는 인사말 용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해방 이후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안녕'이라는 인사말이 소개되고 나서야 많은 사람의 언어생활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하는지 찾아봤지만, ‘안녕'을 인사말로 사용하는 한자문화권 국가는 우리뿐이다. 

 

  어지럽고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날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다. 아마도 가난과 혼란의 시기를 거친 우리의 인사말인 ‘안녕'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우리의 삶이 반영된 것일 것이다.

 

  “안녕"

  “안녕"이라는 인사는 참 신기하다. 서로의 인연이 시작하는 ‘처음'의 순간에 했던 인사말을 헤어질 때 똑같이 주고받는다. 우리는 왜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서로의 잔잔한 날들을 빌어주는 것일까.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헤어짐을 고하는 시간이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사람이기에 그의 평안함을 빌어준다. 그래서 헤어질 때 인사말도 안녕이다.

 


 

“안녕 롤랑 바르트"

 

  나에겐 “안녕"이란 인사를 던지고 싶은 철학자가 한 명 있다.

 

 롤랑 바르트와의 첫 만남은 “사랑의 단상"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사랑'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철학자들에게마저도 사랑이란 개념이 정의하기 너무나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소를 지어본다. 사랑에 빠져 힘들어하면서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 건 보통 사람이나 철학자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롤랑 바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사랑을 명쾌하게 정의하는 것을 포기한다. 자신의 언어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자 다른 사람의 언어에서 사랑에 대해 찾아보고자 한다. 『사랑의 단상』의 원제인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는 사랑 담론의 파편들이란 의미이다. 바르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향연』, 『겨울 나그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트리스탄과 이졸레』 등 다양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모습들을 파편처럼 모으고,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작은 개념들로 다시 분류한다. 


  그렇다고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파편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 속에서 파편 속 사랑의 어떤 모습이 떠오른다. 바르트가 찾은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파편들 속에서 떠오르는 푼크툼이었던 것이다.

 

  푼쿠툼은 롤랑 바르트가 그의 책 『카메라 루시다』에서 내세운 개념이다. 그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으로 눈앞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해석에 관해 설명한다. 스투디움은 복잡한 개념이나 사전 지식 필요 없이 사진을 보듯이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적이고 공통된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해석이다. 

  이에 대비하여 라틴어로 찌름을 의미하는 푼쿠툼은 쉽게 말하면 ‘주관적 해석'이다. 일반적인 이해가 아닌 개인의 취향이나 경험 등에 연결되어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강렬한 자극을 말한다. 푼크툼은 단순한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와 마들렌을 먹으며 갑자기 과거 회상으로 빠져드는 것이 개인의 기억과 음식과 향이 어우러져 갑자기 나타나는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묘사한 다양한 작품들의 언어 이미지를 읽으며 자신이나 독자들이 개인의 경험이나 기억과 연결되어 푼쿠툼으로 사랑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려 했다. 각자의 사랑이 다르기에 개념을 정의하기 힘들다면 각자가 따로 사랑을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특히 『사랑의 단상』은 사랑을 받는 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 즉 ‘주체'에 관한 이야기로 독자는 사랑하는 이로서 자기 경험과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사랑의 단상』에서 보여주는 설명방식은 작가가 주가 되어 내용을 전달하던 독서에 익숙하던 나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처음'의 순간은 내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이후에도 다양한 파편들을 모으는 습관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롤랑 바르트는 나에게 하나의 롤모델이었다.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찾아 읽고, 그의 강의록을 찾았다. 그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생각해보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떠나보내는 안녕을 이야기해야 했던 것은 그를 좀 더 알수록 나의 부정적인 면들을 보는 기분이 들면서였다

  『사랑의 단상』의 2번째 챕터 ‘부재하는 이'에서 그는 사랑의 구조를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으로 나누고, 남는 사람을 사랑의 주체로 설명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사랑의 주체가 되려면 로테가 떠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자신이 옆 마을로 떠나 로테를 떠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워할 수 있고 담론(편지)을 할 수 있게 된 베르테르의 모습에서 부재가 사랑의 원형임을 엿볼 수 있다.

  롤랑 바르트의 부재에 대한 생각은 이후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쓴 『애도 일기』에서 영원한 부재로 변화한다

 

  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나의 슬픔은 그러니까 외로움 때문이 아니다. 그 어떤 구체적인 일 때문이 아니다….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 1977년 11월 5일 일기에서

 

  롤랑 바르트는 이제 부재를 놓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결국은 소설을 쓰지 못한 롤랑 바르트의 모습마저도 ‘소설을 쓸 수 있는 자신'의 부재로 보였다. 당연히 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는 부재를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것 같았다.

  왠지 나도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로테를 사랑하는 자신이 목적이 되기에 로테에게 다가가기보다는 로테에서 멀어 저버리는 것을 선택했던 베르테르의 모습이 나에게도 보였다. 왠지 계속 롤랑 바르트를 쫓다가는 나 역시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는 바르트처럼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쫓다가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느꼈고, 나 자신을 먼저 세워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롤랑바르트를 떠나보냈다

 

  “안녕 롤랑 바르트"

 

  이제는 다시 롤랑 바르트를 찾는다.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를 떠나보낼 때 그를 오해했던 부분들을 고쳐나간다. 

  떠나보냈던 그에게 다시 인사한다.

 

  안녕,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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