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시장 단 하나의 루프탑 카페, 예지동
오랜만에 연극을 보기 위해 두산아트센터로 향했다. 수년 전 무슨 연극을 누구랑 보았는지는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이상하게 그 공간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많은 걸 잘 잊어버리는데, 이렇게 기억에 남아 있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문자 중독 환자답게 어딜 가던 책을 읽을 공간이 필요해서 카페를 찾는다. 이럴 때 난 항상 카카오 지도를 쓴다. 네이버 지도에 달린 평가들은 초롱초롱한 눈의 이모티콘이 엄지척!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믿음이 가지 않는다.
“광장시장 단 하나의 루프탑 카페, <예지동>”
루프탑의 존재 이유는 주변 풍경일 텐데, 광장시장에 그런 게 가능할까 싶어서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그동안 없었던 것은 이유가 있을 텐데, 확신일까 도전일까? 카페의 인스타그램이 링크되어 있어 클릭해본다. 카페 공식 인스타라고 생각했지만, 중간중간 개인의 일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행복해 보이는 결혼식 사진도 보인다. 마치 공장, 시장, 관광지가 얽혀있으면서 자기들만의 조화를 이루는 광장시장 주변 같은 느낌이라 마음에 든다.
녹색 2호선, 을지로4가역을 나와 녹색이었지만 이제는 메마른 잎들이 가을의 막바지를 알리는 청계천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본다. 현재를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공장들, 막걸리 냄새가 가득할 것 같은 광장시장이 눈에 들어오고, 시장의 여러 입구 중 인기 없을 하나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에 예지동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계단을 오르니 YEJIDONG 269-22가 커다랗게 자신을 드러낸다. 들어서야 찾을 수 있는 공간. 아, 예지동이란 이름은 단순히 이 행정구역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구나. 한국에 있는 서울에 있는 종로구의 예지동에 위치한 예지동이란 카페. 이왕이면 개인의 개성이 보이면 좋지만, 카페가 내세울 수 있는 개성의 범위가 하나의 ‘동’ 정도라면 그것도 괜찮은 것 아닐까 생각해보며 커피를 시켰다.
항상 그렇듯 구석에 앉는다. 잘 정돈된 테이블과 의자, 무드등,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해 준비한 듯한 작은 산타 인형과 공간의 크기에 딱 어울리는 크리스마스트리, 커피 원두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 1층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시장 사람들의 목소리, 여름에는 하늘거릴 것 같은, 하지만 겨울에는 추워 보이는 얇은 커튼.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겠지. 테이블과 의자는 아마 가장 좋은 위치를 찾아 계속 움직였을 것이고, 어쩌면 삐걱거리는 소리에 다른 것으로 바꿨을 수도 있다. 저기 구석에 놓여있는 뱅크 단 스탠드는 작년부터 인기를 끌던 아이템(그래서 나도 있다)인데, 처음부터 저 자리에 있었을까? 산타와 트리는 당연히 얼마 전에 저 공간에 놓였을 텐데, 그럼 그전에는 저 공간엔 다른 것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이란 그런 것이다. 이후에 어떤 변화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어떤 용기나 각오, 아니면 자포자기와 함께 일단 출발해야 붙을 수 있는 이름.
난 처음부터 완벽해지고자 하는 강박이 있다.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강박 때문에 항상 사전 조사를 많이 한다. 어느 사이인가 관계는 역전되어서 논문 급으로 조사만 하고 막상 시작은 못 한다. 난 처음이라는 순간을 부여받기가 너무 힘들었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에서 주인공 굴드는 완벽한 첫 문장을 쓰고자 고민에 고민을 더한다. 최고의 첫 문장을 연구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첫 문장을 써보려고도 하지만 완벽한 첫 문장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던 중 이렇게 고민할 거면 첫 문장을 차라리 괄호로 처리해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획기적인 생각을 한다. 어려운 첫 문장은 버리고 시작하면 되잖아! 하지만 그러면 두 번째 문장이 첫 문장이 된다. 그래서 두 번째 문장도, 세 번째 문장도 괄호 처리를 한다. 그리고 그는 단숨에 하나의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
완성하긴 했지만, 아무 내용도 없는 그런 완성이다. 처음이 없는 완성에는 내용이 없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한 무리의 손님이 올라온다. 아담하고 귀여웠던 카페는 갑자기 시골 다방 느낌이 된다. 공간이란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색깔을 만들어 가기에 이 모습도 예지동의 색깔이다. 예지동의 주인은 이런 예상도 하면서 이 공간을 준비했을까?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부여된 ‘처음’의 순간은 지나갔고 삶은 흘러가고 있다. 지금 내가 이 공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흘러가는 삶을 흐르는 대로 두며 하루하루 만들어간 귀여운 주인과 주변 사람들의 색깔이 드러나서 아닐까. 또다시 커피 봉지를 부스럭거리기 시작한 저분은 ‘처음’을 만들어 냈고, (...)(...) 같은 형식만 있는 공간이 아닌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간 공간이 생겨났다.
카페의 이름이자, 카페가 위치한 행정구역이자, 카페의 개성의 영역인 예지동은 과거 시계 장인들이 많이 있던 유명한 시계골목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수많은 째깍 소리의 진동이 있었던 곳,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고쳐가던 곳은 이제 그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있지만, 그 안에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색을 만들어가는 처음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루프탑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