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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복제할 수는 없다: ‘꼭’ 가봐야 한다는 말

by 감동
대만 여행

KakaoTalk_20250615_204130239.jpg 막내랑 둘이 대만가는 비행기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딸과 4일간 대만 여행을 계획했다.
파워 P인 나이지만 딸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니 준비를 안 할 수 없었다.


“대만 필수 여행지”, “대만 꼭 먹어야 할 음식”, “대만 초등학생과 가기 좋은 곳” 등 인터넷에서 수많은 키워드를 검색하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여행을 계획했다.


모든 블로그에서 공통으로 극찬하는 장소와 꼭 가봐야 할 곳, 먹어봐야 할 음식들을 정리해 리스트를 만들었고, 아이와 들뜬 마음으로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행하기 좋은 달'이라던 4월의 타이베이는 생각보다 더웠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샤워해야 할 정도로 끈끈하고 숨이 막혔다.
왜 그렇게 많은 블로그가 휴대용 선풍기를 ‘필수 아이템’으로 소개하지 않았던 걸까?


결국 더위를 많이 타는 아이의 컨디션에 맞춰 일정을 대폭 조정해야 했고, 그렇게 두 번째 날 고속철도를 타고 당일치기로, 타이중으로 향하기로 했다.

KakaoTalk_20250615_204130239_02.jpg 무지개마을에서 막내가 가장 좋아하는 토끼랑

첫 번째 목적지는 수많은 블로그에서 소개된 '무지개 마을'.
도착하자마자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둘러보았지만,
예쁘게 색칠된 몇 채의 집들을 보고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설명에 실망이 밀려왔다.

물론 그 마을이 지닌 역사와 상징은 의미 있었지만, 비싼 고속철도와 택시를 타고 일부러 들를 만큼의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KakaoTalk_20250615_204130239_05.jpg 더운 날씨에 길에서 서서 먹었던 아이스크림


잠깐 둘러본 뒤, 두 번째 목적지인 ‘궁원안과’를 역시 택시를 이용해 이동했다.

이곳 역시 “꼭 먹어봐야 할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해 긴 줄에 서 있었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에 길거리에서 먹는 비싼 아이스크림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걸 정말, 이 돈을 주고, 꼭 먹어야 할 정도인가?’

KakaoTalk_20250615_204130239_04.jpg 멍 때리며 오래 머물렀던 커피숍

결국 짜증이 슬슬 올라오는 아이를 달래 옆의 커피숍으로 피신했다.

멍하니 앉아 있자니 상위 랭크된 블로그들 대부분이 이곳들을 극찬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건가? 감수성이 둔한 건가?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건가?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춘수당 본점으로 향했고, 다행히 이곳은 음식도, 버블티도 기대 이상이었다.


KakaoTalk_20250615_204130239_03.jpg 인생 최고의 노을

식사를 마친 뒤 택시 기사님이 추천한 ‘가오메이 습지’를 향하기로 결심했다.
왕복 택시비에 대한 부담, 짧은 시간, 해 질 무렵의 애매한 타이밍에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그래도 ‘그래, 여기가 아니면 대만에 온 의미가 없다’는 택시 기사님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다수의 블로그에서 당일치기로 가기 어렵다고 했던 가오메이 습지는 살면서 본 노을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인상 깊었다. 짧은 시간, 많은 지출이 있었지만 가장 잘한 선택이 되었다.



감정의 저작권

여행이 끝난 뒤 생각했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루트, 누군가의 감정을 따라가야만 할까? 나 역시 한동안, 블로그에서 상위에 랭크된 글들을 따라다녔다. 그 글들을 꼭 정답처럼 보였지만 ‘꼭 가봐야 할 곳’ ‘꼭 먹어야 할 음식’이란 말들은 결국 누군가의 경험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그와 다른 감정을 느끼면 내가 틀린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블로그 상위 노출을 위해선 비슷한 제목, 비슷한 문장, 비슷한 표현이 요구된다. 감정도, 느낌도 복사해 붙여넣기가 되다 보니 나의 진짜 감정은 어디론가 밀려난다.


내가 타이중에서 느꼈던 실망감, 무지개마을에서의 허탈함, 길거리 아이스크림에서의 헛웃음은 상위에 랭크된 블로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대만 여행기를 쓴다면 아마 상위에 노출되지 않을 것이다. ‘유익하지 않다’라거나 ‘감동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곳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상위 노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망스러웠고, 덥고, 지쳤지만, 그 안에 있었던 진짜 감정들은 그 자체로 유효하다.


‘저작권’은 원래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법률적 권리다.

사전에는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를 갖는 것”이라 정의되어 있지만, 나는 점점 이 단어를 더 넓게, 더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저작권이란, 내가 직접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증표다.

그 감정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더라도, 그게 진짜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건 이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경험이다.


잘 쓰지 않아도, 사람들의 클릭을 끌어모으지 않아도, 그 글이 ‘내가 쓴 글’이라는 사실, ‘내 감정이 담긴 글’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런 글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진짜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담은 이야기들이 더 많이 쓰이고, 더 많이 읽히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도 조금 더 귀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글을 쓴다는 건, 누구보다 먼저 나를 알아가는 일이고, 그 여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감도의 폭이 넓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조금 서툴고 덜 화려해도 진심이 담긴 나만의 이야기야말로 진짜 ‘저작권’을 가진 글이며,

우리를 서로 연결해 주는 가장 인간적인 기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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