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근데 나 게이는 아니야!

세 번째 만남 1/2

by 뿌리와 날개

두 번의 만남이 있고서 어느 늦은 오후,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



발코니에 앉아 얼마 남지 않은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너에게 잘 자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고.



독일어로 읽으면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문장이었지만, 뭐랄까.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의미했던 너의 존재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 얼마 남지 않은 이 석양빛만큼의 의미가, 나에게 생겼어.’



그의 메시지를 읽고, 내 마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살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굳이 과대 해석하고 싶지 않아 딱 거기까지만.








며칠 뒤 요즘 잘 지내냐는 그의 물음에 심심한 것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대답했더니 그가 조만간 한번 볼까? 하고 물어왔다.



나는 시간이 되는 날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이가 아주 오랜만에, 예정에 없던 외박을 하게 됐다. 주말에 밤 근무를 해야 하는 싱글맘인 친구가 그날 자기 아이를 부탁하면서 그 대신 오늘 저녁 시간이 되니 우리 아이를 봐주겠다고 한 것이다.



엄마가 되면 어쩌다 가끔 이렇게 시간이 나도 갑자기 나와서 같이 놀 친구가 없다.



번거롭게 꾸미고 나가봤자 혼자 길거리나 걷다 해지기 전에 들어와 화장 지우고 지쳐 쓰러져 잠들 게 뻔하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처음부터 초밥세트 하나 사다가 침대에 앉아 넷플릭스나 켜는 게 편하다.



그런 나에게 이제, 심심하면 연락하라는 친구가 생겼다.



오늘 갑자기, 아이 없는 저녁 시간이 생겼다고 했더니 그도 마침 시간이 된다고 했다.








원래는 밖에서 만나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나갈 시간이 다가오자 배가 고파졌다.



그동안 일부러 시간 내어 우리 집까지 와서 도와준 일이 고맙기도 해 이 참에 밥을 한 끼 대접하기로 했다. 그도 흔쾌히 좋다며 집으로 오기로 했다.



나는 원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 해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데이트하는 남자에게는 절대 밥을 해주지 않는다.








동양 여자를 대하는 서양 남자들의 태도에는 반복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체구가 작아 매력적이라는 말은, 침대에서 너의 작은 몸으로 나의 성적 판타지를 채워 줄 모습이 기대된다는 뜻이었고, 요리의 ‘요’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너 맛있는 요리 잘하겠구나!"라는 말은, 나는 남편에게 밥상을 차려 바치고 잘 떠받들 것 같은 동양 여자에 대한 진부한 클리셰가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서양 남자를 떠올리면 로맨틱하고, 개방적이고, 시댁 제사가 없는 프리스타일을 생각하듯, 그들도 동양 여자를 떠올리면서 여성스럽고, 순종적이며, 몸이 작고 날씬해 침대에서 마음껏 체위를 바꿔 놀 수 있을 거라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동양 여자라는 치트키로 서양 남자에게 어필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이 가진 동양 여자라는 스키마 속에 내가 끼워 맞춰지는 순간 이것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조만간 내 뒤통수를 후려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동양 여자라는 거죽을 벗어던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 남자를 알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들에게는 두 문화를 오고 가며 끊임없는 성찰과 사유를 통해 성숙해가는 내 머릿속의 철학보다 까만 긴 머리가 더 흥미롭고, 많은 생채기가 났어도 여전히 뜨거운 피가 흐르는 따뜻한 심장보다 볼록 솟은 가슴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가 보다.



독일에서 남자를 만날 때 싱글맘보다 더 어려운 조건은 작고 날씬한 동양 여자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온 이력은 언제 들어도 늘 흥미로웠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에 오기 전 7년 동안 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몸을 가누기 힘든 칠십에서 백세까지의 노인들을 돌봤다.



매일 29명의 환자에게 약을 먹이고, 주사를 놓고, 주기적으로 야간 근무까지 했다고 한다. 80프로 이상이 여성 환자들이었고, 그녀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고, 욕창을 닦고, 재활운동을 돕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직접 집으로 찾아가 집을 청소해주고, 장을 봐주고,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함께 놀아주기도 하는 등 일상을 돌봤다고 했다.



요양보호사 일은, 월급은 적고 노동강도는 높아 독일인들이 기피하는 직업 중 하나이다. 때문에 대부분 생계가 막막한데 독일어를 못하는 외국인 여자들이 많이 포진해있는 직종이기도 하다.



직업교육을 두 개나 마치고, 사무직으로 편하게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굳이 현장에 7년 씩이나 있었던 걸까?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런 고된 일을, 그것도 고작 스물네댓의 청년이 돈 때문에 하기에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다, 7년은.



“요양보호사 일은 몸이 많이 힘들다고 하던데 넌 괜찮았어?”


“몸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마음이었지. 어제까지 인사하고 헤어졌던 할머니를 오늘은 욕조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한다거나, 죽어가는 할아버지 곁에서 손을 잡고 해 줄 수 있는 일이 그가 외롭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라거나 하는 일들은…….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더라. 7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이별을 겪었어.”



그의 맑은 하늘색 눈동자가 금세 촉촉해졌다. 자기가 돌봤던 노인들과의 유쾌했던 에피소드들도 많이 들려줬는데 그럴 때면 그의 두 눈은 그들을 향한 인간애와 아름다운 심성으로 반짝였다.



가까웠던 이의 죽음을 감당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닐진대 자신이 돌보던 그 많은 사람들이 곁에서 끊임없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7년이나 지속했다는 것은, 그가 보통의 정신력과 기상을 가진 사람은 아닐 거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길고 긴 대화를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노인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는 진짜였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진짜 남자가 이렇게 내 앞에 떡 하니 앉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가 내 대학 동기라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와…. 너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난 너 생긴 것만 보고 인생 대충 사는 한량인 줄 알았는데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어. 진심으로 존경해.”


“그래? 나는 외국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아기 키우며 공부까지 하는 네가 더 존경스러운데.”


그거야 내 자식이니까 당연한 거지. 너처럼 내면이 강인하고 단단한 사람은 보기 드물어. 게다가 네가 걸어온 길이 보통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은 아니니까. 책임감이나 성실함은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그런 일, 그렇게 오래 할 수 없는 거잖아.”



내 말에 그가 깜짝 놀라며 눈빛이 확 바뀌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너도 꽤 흥미롭다. 내 얘기를 듣고 너처럼 반응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내 첫인상에 대해 말했듯이, 보통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관심 없거든. 그냥 눈에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고 더 알려고 들지도 않지. 여자들은 더 심해.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 내 외모가 아닌 속을 들여다 봐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기분 좋다.”



그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너 이런 일 한다고 말 안 했어?”


“하지. 해도 다들 지루해해, 이런 얘기 듣는 거. 별 관심도 없고. 그냥 술 마시고 춤추다 침대로 갈 생각이나 하지. 그래서 내가 5년째 싱글인 거야.”


“너 5년째 싱글이야?”


“응. 5년 동안 연애 안 했어.”



새파랗게 젊은 잘생긴 독일 청년이 5년 동안 연애도 안 하고 살았다라….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있다가, 속으로 아, 진지한 관계는 싫어서 사귀지는 않고 가볍게 잠만 잤구나. 했더니 내 표정을 유심히 보던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여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눈을 크게 뜨고 한번 더 단호히 말했다.



“5년 간 여자 '털끝' 하나도 안 건드렸어!”



흠…. 5년 동안 섹스도 없었단 말인가. 근데 독일애들이 그게 가능한가? 5년 씩이나, 그것도 남자가……?



그럼 몸에 어디 문제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그가 독심술이라도 하듯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또다시 말했다.



“노노! 신체 건강해!”



생각을 읽혀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그럼 남자를 좋아한다는……? 하는 생각이 들어 갸우뚱하는 찰나,



“근데 나 게이는 아니야! 여자 엄청 좋아해! 여자들이랑은 가끔 썸만 탔어, 썸만!”



하고 그가 재빨리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그러나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는….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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