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는 한참 어린 여자들과 같이 산다

두 번째 만남

by 뿌리와 날개

며칠 뒤 그가 다시 우리 집을 방문해 지난번 마무리하지 못했던 수강신청 마치는 일을 도와주었다.



“혹시 네가 지난 학기에 썼던 법전 나한테 중고로 팔지 않을래?”


“아…. 나는 그거 앞으로도 갖고 있으면서 종종 찾아볼 거라 좀 그렇고, ****한테 물어볼게.”


“****가 누군데?”


“나랑 같이 사는 여자앤데 걔도 우리 과거든. 걔도 그 시험 끝나서 이제 그 책 필요 없을 거야.”


“여자애랑 같이 살아?”


“응.”


“단 둘이?”


“아니. 셋이. ***라고 있는데 걔도 같이 살아.”


“그럼 여자 둘에 너 하나?”


“응.”



아….


“걔도 우리 과야?”


“아니. 걔는 직장인.”


“몇 살인데?”


“걔네들은 나보다 한참 어려. 스물셋, 스물일곱.”



아…….

그러니까 너는, 너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 둘과 같이 산다는 말이구나…….








여자들과 붸게(Wohngemeinschaft/ 독일에서 흔한 주거 공동체)에 산다는 말을 듣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독일에서는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들이 방 서너 개짜리 집을 구해 저렴하게 방만 월세로 빌려 사는 제도가 잘 정착되어 있으니까.



남녀가 섞여 사는 것도 흔한 일이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같은 과 남자랑 같이 살아도 불편함이 없다는 정서가 나로서는 쉽게 와닿지 않았다.



“남녀가 같이 사는 붸게에 대해서 말만 들었지, 실제로 사는 사람은 처음 보네. 너희들한테는 당연한 거 겠지만 한국에서는 20대 여자 둘이랑 30대 남자가 한 집에 사는 게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나는 좀 이해하기 어렵거든.”


“걔네는 나한테 여자가 아니라 동생들이야. 그리고 한 명은 7년 만난 남자 친구가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남자 친구는 없지만 만나 달라는 남자가 줄을 섰어. 꾸준히 데이트도 즐기고.”


“아. 그럼 걔는 왜 7년 만난 남자랑 같이 안 살고 너랑 살아?”


“원래 우리 셋이 살았어. 그런데 너무 붙어있으니까 힘들다고 걔 남자 친구가 나간 거야. 그래서 지금 그 방에 ***가 들어오게 된 거고.”



아…….



들어보니 납득이 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만나 달라는 남자가 줄을 섰다는 또 다른 여자애가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대놓고 묻는 것도 오버스럽다. 그와 내가 무슨 사이라고.



그래도 어쨌거나 이 밤에 우리 집 거실에 앉아 있는 남자이기에 찝찝한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에둘러 물었다.



“여자들이랑 같이 살면 안 불편해? 내가 남자랑 같이 산다면 속옷도 널어야 하고, 생리 중에 화장실 쓰는 것도 불편할 것 같은데.”


“뭐 널린 속옷을 가끔 보기는 하는데, 난 걔네들이 무슨 빤쓰를 입는지 같은 거에 관심 없어서. 걔네들도 아마 내 빤스에 관심 없을 걸?”



그 말을 하면서 장난스레 인상을 찌푸리고는 두 손가락으로 팬티를 집어 휙 던지는 듯한 개구진 몸짓에 그만 푸핫 하고 웃음이 터졌다.



“생리 중이면 하나는 틀어박혀 울고, 하나는 신경질 폭발이라 오히려 내가 힘들지. 근데 뭐 이해해. 난 워낙 많은 여자들 틈에서 생활했어서 여자들 생활리듬에 익숙하거든. 그리고 각자 사생활을 존중하니까 옆방에 사는 게 남자든 여자든 큰 상관은 없어.”



연인이 아닌 남자와 동거를 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불상사, 이를 테면 화장실 몰카라던가, 음료에 정신을 잃는 약을 탄다던가, 술 취한 밤에 몰래 방문을 열고 침대를 비집고 들어온다던가, 백번 양보해 매너 있게 잘 지낸다고 해도 어느 날 남자 친구랑 싸웠다고 울며 은근슬쩍 룸메이트가 기대 올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가 내가 던진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있는 그에게서 여자 룸메이트들을 잠재적 섹스파트너가 아닌,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인격체로 존중하는 그의 인간 됨됨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색안경을 끼고 그를 질 낮은 인간으로 의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너는 아마도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 여자애들이 너의 인성을 믿고 같이 사는 걸 보면.”


“큰 오빠 같은 거지. 걔네들도 내 친동생들이나 다름없고. 언제 한번 놀러 와! 좋은 애들이라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친해지면 너 아이 봐줄 사람 없을 때 맡겨도 되고. 걔네들도 둘 다 애들 좋아해서 너랑 아이랑 같이 놀러 오면 좋을 거 같다고 했어.”


“걔네들한테 내 얘기도 했어?”


“응.”


“왜?”


“지난번에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갔더니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냐고, 연락도 안 받고 뭐했냐고 엄청 뭐라고 하더라고. 걱정했다면서. 그래서 너네 집에 있었다고 했지.”


“그랬더니?”


“둘 다 눈이 똥그래져서는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네가 누구냐고 온종일 묻길래 대답해줬어.”








그가 룸메이트들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나를 과연 뭐라고 소개했을까? 11시 넘어 집에 들어갔다고 저렇게 걱정을 할 정도면 평소에 일찍 일찍 다닌다는 소린데, 여태 여자 친구 얘기가 없는 것도 그렇고, 아마도 싱글인 게 확실한 것 같다.



그건 그렇고, 그에 관한 오랜 선입견이 와장창 깨지고 나니 라는 사람 자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느 독일 남자 같았으면 이 정도 친밀도를 가진 사이에서 나의 질문에 대해 너무 사적이거나 직설적이라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고 대답을 회피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애초에 그런 빌미가 될만한 사생활을 공개하지도 않았겠지.



상당히 친해진 듯하여 조금 더 다가가려고 하면 활짝 열어둔 듯 보였던 두꺼운 투명 외투를 황급히 닫아 버리고는 속내를 꽁꽁 숨기는, 여느 겁쟁이 독일 남자들과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의뭉스러운 구석도 없고, 내 거침없는 질문에도 하나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것 하며,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유머러스하게 잘 받아치는 센스까지….



알면 알수록 사람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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