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에 관한 몇 가지 기억들

by 뿌리와 날개

그의 첫인상이 어땠더라….

기억을 더듬어 입학하던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백 명이 넘는 인파 속에서 나 이외의 동양인은 아직 찾질 못했다. 나이대가 비슷한 동양 여자들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도 나처럼 아이가 있으면 더 좋겠다 싶었다.



재빠르게 사람들을 스캔하며 나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분류해놓은 서랍들 속에 나와 상관없는 부류들을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자원이 한정적인 외국인 싱글맘으로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빨리 판단해야만 한다. 어설픈 인간관계에 낭비할 시간이나 에너지 따위는 없으니까.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인 과에서 서로 어색하기는 독일 애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남자들끼리 모여 한쪽에 그룹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같이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들 틈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염 없이 깔끔하고 곱상한 얼굴에, 그 큰 독일 남자들 틈에서도 키가 큰 편이라 누가 봐도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다만, 기생오래비같이 말끔하게 정리한 외모도 모자라 목걸이에 팔찌 하며, 왠지 껄렁껄렁해 보이는 허우대에 백팩을 한쪽 어깨로만 맨 폼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날라리




내 눈에는 더도 덜도 말고 딱, 날라리였다.



서랍 속에 재빨리 그를 나와 상관없는 부류로 정리해 넣고는 문을 닫았다.








그에 관해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카페 테리아에서 동기 여러 명과 문화 차이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대화 말미에 내가 그런 얘기를 하며 일어났다.



“여기서 꽤 오래 살았는데도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네. 독일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자주 외톨이인 것 같은 기분이야.”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그가 나를 쳐다보고는 한 마디 툭 던지고 지나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난 독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데도 그래. 하긴 나도 완전 독일 사람은 아니지, 폴란드 피가 섞였으니.”



의외였다. 그는 전형적인 사회 기득권의 최상위층 그룹에 속하는 백인, 남성, 대학 교육을 받는(은) 자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이 독일 사회에서 소외계층으로 분류되는 동양인 싱글맘인 나에게 동질감을 표했다.



대화는 그렇게 뚝 끊겨버려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지만, 나도 마찬가지라는 그의 말에서 뭔지 모를 여운이 느껴졌다….








또 하나는, 연애상담이었다.



그 당시 꽤 진지하게 데이트하던 남자가 그의 전 여자 친구와 연락하는 문제로 나를 골치 아프게 하고 있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누구나 잘 연락하고 지내는 엑스 한두 명쯤 있는 거 아니냐며….



신경 쓰지 말라는 친구들의 조언에도 나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일 여자들 입장은 알겠으니 독일 남자들 입장도 좀 들어봐야겠는데 아는 남자가 없었다.



때마침 나이대가 비슷하고 안면이 있는 대학 동기 두 명이 함께 걸어오기에, 이때다 싶어 물었다.



혹시 연락하고 지내는 전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만약 있다면 지금 여자 친구가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 명은 그였고, 다른 한 명은 수업 때 내 옆에 앉아 필기를 곧잘 도와주고는 했던 또 다른 동기로 그에게는 5년째 같이 사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여자 친구를 많이 사랑하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그 친구라면 내가 기다리던 대답을 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말했다.



“엑스랑 여전히 연락하지. 지금도 수시로 도와줄 일 있으면 도와주는데. 여자 친구가 어떻게 감히 내 결정에 왈가왈부할 수 있어? 그건 날 사랑하는 게 아니지. 내가 사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면 그녀가 떠날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나와 엑스의 관계를 그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거야. ”



본인의 자유의지를 침범당할 일이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지 그 친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당히 감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좋으면 계속 사귀지 그럼 왜 헤어졌어?”


“연인관계를 유지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자였어.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만큼 엑스도 한 인간으로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그녀가 행복하길 바래.”



오 마이 갓. 그래…. 마흔에 가까운 네가 그렇게 말을 할 정도면…. 이것이 진정 너희들의 사고방식이로구나.

그런 것 까지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말문이 막힌 채 실망하던 그때, 옆에 조용히 있던 그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나는 좀 달라…. 지금 여자 친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엑스랑 연락하는 거 별로야. 복잡해지는 거 싫거든. 무엇보다 지나간 여자 때문에 내 지금 여자 친구가 행복하지 않다면 나는 그게 더 싫을 것 같아. 나에게는 지금 내 여자 친구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그 연애 상담을 하고 다니면서 헤어진 엑스와의 관계를 대하는 쿨한 독일 사람들의 태도에 놀랐었고, 두 사람의 그간의 이미지로 대답을 정확하게 반대로 예측했던 내 예상과는 완전히 뒤바뀐 대답에 한 번 더 놀랐다.



그가 나와 상관없는 부류라는 서랍 속에서 나와 나랑 비슷할지도 모르는 부류라는 서랍 속으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날라리인 듯 날라리 아닌 날라리 같던 그가 오늘 우리 집에 왔었다.



허허실실 대충 살 것 같던 겉모습과는 달리 주관이 뚜렷하고, 논리적이며, 상당히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그는, 무엇보다 가족과 하나님을 무척 사랑하고, 그 나이 또래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처럼….



“그”라는 사람을 내 낡은 서랍 속에서 꺼내 통째로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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