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번째 만남

by 뿌리와 날개

간단하게 미니 소세지랑 깍둑 썬 치즈, 과일 몇 가지를 준비해 놓고 창 가에 서서 기다리니 조금씩 그가 보인다.



우리 집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 남자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과에 같은 학기로 입학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별도, 국적도, 가족관계도, 라이프스타일도….



만날 약속을 정하려면 각자 다이어리를 펴놓고 최소 일주일에서 이주일은 여유를 두고 조율해가며 날짜를 잡는 엄마들끼리의 만남이 익숙한 나에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다음날 당장 우리 집에 등장한 이 남자는 뭐랄까.



그날이 그날 같던 건조한 내 일상에 갑자기 툭 떨어져 꼬리를 팔딱거리며 힘차게 통통 튀는 물고기 같았다.








저녁 7시 약속에 맞춰 6시 59분에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웬일인지 벨을 누르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 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미심쩍었다.



‘뭐 하는 거지?’



그때 내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집 앞이라고.



아, 자는 아이가 깰 까 봐 벨 대신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날티 나는 외모와는 다르게 사려 깊은 행동이 의외라 조금 놀랐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니 긴 다리로 성큼성큼, 그러나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사뿐사뿐 올라오는 그가 보였다.



단정하게 문 앞에 선 그는 가벼운 포옹 대신 팔꿈치로 인사를 건넸다. 코로나가 퍼진 뒤로 달라진 독일의 인사였다.








식탁에 마주 앉아 차가운 무알콜 맥주를 하나씩 들고 담소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나에게 그동안 왜 보이지 않았느냐공부를 계속하는 거냐고 물었다.



내가 휴학을 하는 바람에 동기들보다 학기가 뒤쳐지다 보니 그동안 학교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던가보다.



나는, 사정이 있어 학교를 좀 쉬었다고 했다.



아이는 잘 크고 있냐고 했다. 잘 크고 있다고, 벌써 초등학생이 됐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좀처럼 끊이지 않고 잘 흘러갔다.



내가 말을 하면 그는 진지하게 경청했고,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듣는 자세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주제를 이어가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오픈하는 모습에 상당히 놀랐다. 독일 사람답지 않았다.



내 감정선을 따라 자신의 템포를 맞춰주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이렇게 솔직한 사람인 걸까?



게다가 그가 수업 시간에 말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그렇게 잘하는 줄도 몰랐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과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







그는 매일 쏟아지는 코로나 관련 메일 폭탄 속에서 꼭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가려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전면 온라인으로 바뀐 학사일정을 하나씩 체크하며 복잡해진 수강신청도 도와주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정을 제외하고 상당 부분이 해결되었다.



대충 수강신청만 도와주고 집에 갈 줄 알았는데 그는 나와의 대화를 꽤나 즐기는 듯 보였다. 혹시 자기가 말이 너무 많거나, 졸려서 자러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을 하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같이 놀 사람이 앞에 앉았으니 오늘은 퍼즐 대신 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처음 보는 게임을 펼치니 그가 살짝 당황했다. 이내 룰을 숙지하고 잘 따라오는 걸 보니 꽤나 영리하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11시.



너무 늦게까지 있었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그를 보니 살짝 아쉬워진다. 더 놀다 가지 싶으면서도 단둘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어색함 없이 이렇게 오래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것에 놀랐다.



록다운으로 고립되어 있다 모처럼 만난 사람인 데다 대화가 어찌나 흥미롭던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쉬움을 애써 감추며, 요즘 많이 심심했는데 오늘 나랑 놀아줘서 즐거웠다고, 고맙다고 했더니 그가 말했다.



너만 괜찮으면 오늘처럼 종종 놀러 올 테니 심심하면 연락하라고.



아, 정말? 진짜 심심할 때 연락하면 놀러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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