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사이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지 일주일 만에 남편은 한국행 편도 비행기 티켓을 사서 반나절만에 나와 아기를 한국으로 보내버렸다. 어리둥절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주일 간의 냉전 끝에 남편은 휴식이 필요하다며 간절히 부탁했고, 나 역시 타지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다.
게다가 아기가 태어나고 일 년이 넘도록 남편은 한국에 가고 싶어 하는 나와 아기를 붙잡았었다.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남편은 언제나 나를 그렇게 사랑했었다. 한국의 가족들에게 아기도 보여주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좀 쉬다 오고 싶었지만 그런 남편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기가 하루가 다르게 크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예쁜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남편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도 소중하지만, 결혼을 한 이상 중심은 나와 남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남편과 그런 갈등이 생겼다. 남자들은 힘들면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다던가. 내가 지친 만큼 남편도 힘들거라 짐작했다. 저렇게 혼자 있고 싶어 하는데 좀 쉬게 두고 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몇 달 뒤에 한국에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 참에 조금 앞당겨 들어가는 셈 치자 싶었다. 그와 연애 및 결혼까지 5년을 함께 하면서 이런 싸움은 난생처음이라 낯설기도 했지만, 그는 나의 남편이었다. 겨우 3주 전에 조촐하게 시댁 가족들과 아기 돌잔치도 했다.
여행 가기 전에 엄마 아빠랑 싸웠다고 해서, 내가 없는 사이 엄마 아빠가 나를 버리고 이사를 간 뒤 연락을 끊어버리는 일을 과연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결혼했고,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가 있는 가족이었다. 보통의 국제커플이 그러하듯 주기적으로 헤어져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했고, 믿음 또한 단단했다. 맹세코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남편이 비행기 티켓을 끊은 다음날 아기와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 가서 한 한 달 푹 쉬고 오면 남편도 나도 훨씬 건강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이 갈등을 풀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이 남편과 내 결혼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의 일방적인 연락두절
내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남편과 연락이 두절된 것은 그다음 날부터였다. 메시지를 남기고 시간이 흘러도 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남편이 휴대폰을 꺼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이 넘어가도 휴대폰이 꺼져있는 것을 보고 조금씩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메일을 보내도 대답이 없었다.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어머니와는 내가 원할 때마다 연락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그가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이니 조금 더 시간을 주라고 했다. 유럽에 살면서 한국에 비하면 한없이 낮은 노동강도와 여유로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유럽인들을 보며 그들의 유리 멘털에 개탄하고는 했다. 그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어머니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내가 유난스러운 듯했다. 나와는 다른 유럽 사람이니 같은 상황에서도 나보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강도가 높을 거라 짐작하고 그를 배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그의 어머니, 나의 시어머니이자 아이의 할머니가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아는 나의 시어머니는, 40년 가까이 가정적인 아내로 살며 까다로운 남편과 아이들을 잘 보살펴 온 헌신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남편과 연락이 끊어졌어도 상당 기간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던 데에는 남편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에 대한 믿음 또한 컸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의 합세
한국에 들어온 뒤 남편과 연락이 끊어지고서도 긴가민가 했던 나를 각성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페이스북이었다. 연락 안 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남편의 온라인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남편이 인스타그램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나는 SNS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아는 것은 내 페이스북과 연결된 남편의 페이스북이었다. 그런데 그의 페이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의 페이지를 찾을 수 없었을 때 나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동안 꾸준히 우리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우리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당시 함께 했던 모든 추억과 친구들이 그의 페이스북에 담겨있었다. 그런 페이스북을 삭제한다는 것은 분명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에게 당장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리며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그까짓 인터넷 계정 하나 없앤 걸 가지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며 괜찮다고 했다.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시어머니에게, 괜찮지 않다며 나의 의사를 강하게 피력했다.
그때까지 나는 “시부모님”하면 으레 한국인들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듯이, 그것에 맞춰서 행동해왔다. 시댁에서 내가 가장 어려워해야 할 사람이되, 나를 딸처럼 아껴주는 좋은 시부모님이라 감사했으며, 남편을 낳아준 부모님으로서 사랑했고, 나보다 세상을 오래 산 웃어른으로서 존경하고 되도록 순종했다.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순종이랄 것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하는 말에 굳이 “토”를 달아본 적이 없을 뿐이다. 시키지 않아도 남편보다 먼저 전화를 드렸고, 아기 사진을 매일 보내드렸으며, 휴가가 생기면 관광지를 놀러 가는 대신 시댁에 들리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아도 세상에 자식이 자주 찾아뵈어 반갑지 않을 부모는 없다고 믿었다. 만리타국에 있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내 부모님을 대신해 남편의 부모님이라도 자주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한국인 며느리로서 기본적 도리라 생각하는 것들을 하고 살았을 뿐인데, 그것이 이 독일 문화에서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폄하하는 짓거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외국에서 자주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한국에서의 “인간의 도리”와 “예의”, “미덕”이라는 것이 만국 공통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남편이 나와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지 한 달이 다 돼가는데, 영문을 몰라 괴롭다고 호소하는 나에게 괜찮다고 한국에 계속 머물라는 시어머니를 보며 나는, 그때부터 시댁에 대한 빌어먹을 예의를 집어치우고 내 뱃속에서 올라오는 본능적인 느낌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들
남편에게 끊임없이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 꺼진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봤자 읽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기가 막혔다. 분명 우리는 5년을 알고 지낸 사이고, 법적으로 결혼도 한 사이였지만 남편이 휴대폰을 끄자 남편에게 연락할 길이 없어졌다. 남편의 페이스북이 사라지자 나는 인터넷 어디에서도 남편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그가 진정 이 세상에 존재하던 사람이 맞나?’, ‘내가 결혼을 했던 게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남편 주변의 누구에게도 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기의 출생과 동시에 남편의 고향에서 8시간도 넘게 떨어진 새 도시에 새롭게 정착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원래 나고 자란 마을에서도 친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새로 이사 온 도시에 지인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남편의 회사 동료 그 누구와도 교류가 없었으며, 연락처도 없었다. 남편과 함께 살던 집 주변 이웃들과도 소통이 없었다. 독일어를 못하니 당연했다.
나 역시 친구가 없었다. 당시 알고 지내던 독일인 아기 엄마 세 명 정도가 있었지만, 친구라기보다는 겨우 몇 달 데면데면 알고 지내는, 말도 잘 안 통하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한국인 여자들 몇몇과 슬슬 안면을 트고 지낼 무렵 한국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과도 딱히 교류랄 것이 없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아기와 내가 하루아침에 살던 집에서 사라졌는데도, 한 달이 넘도록 우리를 아는 독일 사람들 그 누구도 내 휴대폰으로 우리의 근황을 물어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아기와 한국에 있다는 것과 남편에게 살해 당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 파묻혀 있는 것과 도대체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까지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은, 로맨틱한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하고, 자상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남편과 함께 평화로운 독일의 한 마을에서 아기와 세 식구 단란하게 살고 있는, 사랑받고 행복한 아내였다. 막 태어난 아기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내다 남편 퇴근할 시간이 되면 정류장으로 유모차를 밀고 마중 나가 남편과 반가움의 키스를 나누던 그런 여자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던 것일까? 남편과 영문도 모른 채 연락이 두절되어도 어디 연락할 곳도 없고 도움 청할 곳도 없는 현실을 깨달은 그때가, 독일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에 의존해 살면서 독일어도 못하고, 직장도, 친구도, 남편 외에 다른 가족도 없이 집구석에서 아기나 키우던 나의 위치를 각성한 순간이었다.
결혼반지조차 없던 나는 독일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을 꺼내보았다. 그것이 유일하게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며 나와 아기가 얼마 전까지 독일에서 살고 있었다는 물리적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