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살기 위해 버려야만 했던 것

현실 직시

by 뿌리와 날개

피가 마른 시간들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에게서 가끔 이메일로 대답이 오면, 어르고 달래 통화를 유도했다. 그가 본인이 퇴근하는 저녁시간에 맞춰 내일 전화하겠다고 약속하면, 나는 오밤중인 그때부터 밤새 잠을 못 자고 다음날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날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가 오지 않아도 화를 내는 대신 다시 이메일을 보내 혹시 무슨 일이 있냐고 조심스레 물어야 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피곤하니 주말에 통화하자고 했다.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토요일만을 기다리며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남편의 전화만을 기다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기다려도 끝내 전화가 오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잠자코 있어야 했다. 칼자루는 그가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연락을 끊어버리면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나는 끝없이 그를 어르고 달래 전화를 하도록 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통화가 되면 그 사람은, 여기 생활이 모두 달라졌으니 한국에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나와 아이가 한국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혼자서 이사를 했다. 원래 함께 이사 가려고 봐 둔 집이었지만, 우리가 없으니 그가 모든 일을 혼자 한 것이다. 그가 이사하며 우리의 짐을 팔고, 버렸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나는 심신이 지친 남편이 그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한 것에 미안하고 고마워하며 저자세로 일관했다.


아기가 남편을 잊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기를 통해 남편의 마음을 돌리고도 싶었다. 그래서 통화가 될 때면 아기를 바꿔주고 그의 감성에 호소했다. 아기가 아직 어려서 아빠, 아빠 말도 못 하고, 재롱도 떨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를 희망고문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 아쉬울 것 없는 그가 가끔 선심 쓰듯 전화한다고 하면 나 혼자 필사적으로 아기와 나의 운명을 걸고 매달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줄을 잘라버릴까 봐 매 순간을 조마조마해하며….


그렇게 말 그대로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시간을 두 달 정도 견디고 나니, 나이 스물아홉에 새치 하나 없이 까맣던 머리 한쪽이 하얗게 샜다.








현실 직시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며 언제 끝날 지 모를 영원 같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남편이 왜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날들이 흘러만 갔다. 독일에서 아기 예방접종일이 다가오는데 나는 기약도 없이 한국에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남편이 아직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혼을 원하냐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며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울면서 말라죽어갈 수는 없으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독일 남자와 이혼한 여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정보가 없어 독일 사람과 이혼한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그래도 나오지 않아 유럽인과의 국제이혼 사례 자체를 찾았다. 나오는 것이라고는 매매혼을 통해 한국에 넘어온 동남아시아 여자들과 한국인 남자들의 이혼 사례뿐이었다. 그러다 어렵사리 베를린 리포트를 통해 독일 남자와 이혼했다는 사람의 연락처를 보게 되었고, 망설일 틈도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연락을 했다. 독일에 20년 가까이 살았다는 그 사람은 내가 상황을 설명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마음 떴네, 그 남자! 기대하지 마요! 혼자 살 생각해!” 나는 그녀가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이혼했다고 남도 다 이혼하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영어가 가능한 가족 상담사를 찾아갔다. 남편의 마음이 녹아 여름휴가에 맞춰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 함께 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담료가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지만, 깨어지는 가정 앞에 아까울 돈이라는 것은 없었다. 내용적으로 상담 자체는 엉망이었다. 왜냐하면 “자상하고 성실한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라는 틀린 대전제로 상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담가와 나는 남편의 번아웃을 의심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흠을 잡기보다는 의존적인 나를 반성하고 돌아보며 나의 무심함과 이기심으로 지쳐갔을 남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방향으로 상담을 이끌어갔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 비싼 돈을 주고 엉뚱한 내용으로 상담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 상담은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나를 잃지 않고 오히려 지난 내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현재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돌아봄에 있어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상담가는 그런 나의 자기 성찰 능력에 매번 감탄하곤 했다. 그때 상담가와 함께 천천히 나를 돌아봤던 일련의 과정과 경험은 그 이후 독일로 돌아와 내가 정신적으로 극한에 놓일 때마다 스스로 멘털을 다잡는데 근간이 되어주었다.








살기 위해 수치심을 버리다


열 번의 상담이 끝나고 나는 더 이상 독일로 돌아가는데 남편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한국의 가족들에게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들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막상 내가 이 상황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니 상심이 큰 듯했다. 부모님은 이대로 한국에 남는 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권하기도 했지만, 계속 살든 이혼을 하든 이런 식으로 떠밀려 한국에 주저앉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담을 통해 자신감도 생겼고, 남편을 직접 만나면 좀 나을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문제는 살 곳이었다. 독일에 도착한 뒤 남편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 내가 아기와 갈 곳이 없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나는 남편이 이사 간 집의 열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가정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대해서 가족 말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이런 상황이 한 달이 넘어가자 머릿속에서 이혼 후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든 감정은 창피함이었다. 남편에게 이혼당한다는 창피함. 그리고 그다음은 두려움이었다. 젖도 못 뗀 어린 아기와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 두려웠다. 하지만 독일로 돌아가려면 현지에 사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내 상황을 알려야만 했다. 한 명에게만 알리고 비밀을 지켜달라고 말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런다고 이 소문이 한인들 사이에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행복하게 사는 척, SNS로 자랑질을 하고 산 것도 아니었건만 남편에게 버림받은 것 같으니 도와달라는 말은 정말 꺼내기 힘들었다.


살기 위해 치부를 까발리느냐,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입 다물고 조용히 죽느냐. 개 같은 상황과 개 X 같은 상황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했지만, 어느 쪽을 취해도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만약 남편과 화해하고 다시 잘 살게 된다면 그 망신을 다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지만 직관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다시 살 때 살더라도 더 이상은 이렇게 남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비참해도 지난 두 달간 한국에 숨어 지내며 피가 말랐던 것보다는 덜 비참할 테니까. 그렇게 결심이 서던 날, 나는 독일에서 간신히 안면만 트고 지낸 한인 중 한 명에게 갈 곳 없는 이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숙소 제공을 부탁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oodtherapy.org/blog/its-for-you-not-them-forgive-to-help-yourself-heal-071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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