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정면승부
살기 위한 발버둥
그렇게 독일로 돌아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3일간 지내며 매일 같이 남편에게 호소했다. 새로 이사 간 집에 들여보내 달라고. 한국에 있으라던 남편의 말을 어기고 돌아왔기에 남편이 성을 낼까 전전긍긍하며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메일을 보냈다. 남편을 잘 달래기 위해 내가 머물던 집의 독일인 남편에게 부탁해서 내가 쓴 독일어 메일을 첨삭받았는데, 그 남편이 내게 말했다. 너는 노예가 아니니 그렇게까지 애걸복걸할 필요 없다고….
그 이후로 독일 사람들과 부대껴 6년째 살아보니 그 당시 그 집 남편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내가 내 남편과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노예에 비교하다니. 독일 사람들은 그저 ‘정’이라는 개념을 몰라서 그런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4일째 되던 날 남편이 집에 와도 된다고 허락했다. 짐을 싸들고 아기와 남편이 이사 간 집으로 들어갔다. 매일매일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그의 비위를 맞추고, 되지도 않는 그의 말을 침착하게 다 들어주며 그렇게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한가닥 희망을 붙든 것 같아 잠시나마 마음이 놓였지만, 다음날 다시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을 볼 때면 벼랑 끝에 한 손으로 매달린 채 다른 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버티는 심정이었다. 그 매달린 손을 놓치면 나는 아기와 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떨어질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그 열흘 동안 남편이 내 손을 잡고 절벽 위로 끄집어주기만을 간절히 고대했다.
한편으로는 남편과 평온했던 세 달 전으로 돌아간다면 남편의 말을 더 잘 듣는 착한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기를 매일 밤 기도했다.
아이 때문에 참고 산다는 거짓말
내가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버텼던 이유는, 남편이 적어도 아기의 아빠로서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혼생활이 끝난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립을 하려면 뭐라도 있어야 했기에 내가 독일어를 배우고 구직을 하는 동안 남편이 서포트해주기를 바랐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남편은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박대하는 것도 모자라 아기에게까지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 모든 모욕을 감내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자식이었다. 그가 내 아기의 친부였기 때문에, 그가 아기에게 애정을 보이는 한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스트레스로 우는 아기에게 소리를 지르고, 울지 말라고 아기를 잡아 흔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현실을 깨달았다. 이 빌어먹을 사달이 난 게 지금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에 내 아기가 지난 몇 달간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젖을 떼야했는데, 아기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아무리 내가 남편의 비위를 맞추고 천사같이 행동 한다한들, 집안에는 더 이상 포근한 온기와 사랑이 흐르지 않았다. 사이가 틀어진 부모 사이에 놓여 스트레스로 매일같이 얼굴이 터지도록 우는 아기를 보니 아이 때문에 참고 산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았다. 이미 전쟁터가 되어버린 집구석에서 내가 아기를 방패 삼아 두려움이라는 화살을 피해 몸을 숨긴 동안 아기는 온몸으로 나를 대신해 그 화살을 맞고 있었다. 아기는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진정 아기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두려움에 웅크리고 앉아있지 말고 엄마답게 일어나 이 공포스러운 가정을 평정해야 했다. 더 이상 그런 인간을 아버지랍시고 존중할 이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움켜쥔 결혼, 그 끈을 놓았을 때
그렇게 독일로 돌아와 남편과 지낸 지 열흘 째 되던 날, 내가 이혼하지 않고 남편과 계속해서 산다면 남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사전을 찾아가며 독일어로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그 요구사항에 하나씩 번호를 매긴 뒤 문서의 형식에 맞춰 작성하고, 마지막에 서명란을 만들어 출근한 남편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직장 상사와의 불륜을 인사과에 고발하지 않는 대신 그녀에게 남편의 이직을 위한 좋은 추천서를 쓰도록 요구하라고 했다. 또 그녀와 연락을 끊고, 이사를 가자고 했다. 그녀와 나눈 대화들은 백업해 나중에 혹시라도 남편이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때 직장 내 성희롱의 증거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당신도 가정을 지키고 싶고, 이 모든 일을 이행한다면 나 역시 참고 넘어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내 조건 중 한 가지라도 충족이 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바람피우는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는 여자들의 말을 들으면 비겁한 변명 같아 속이 터졌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남편이 다른 여자랑 섹스 몇 번 했다는 이유로 깨기에는 가정이라는 것이, 내 자식의 울타리를 내 손으로 허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최대한 버텨보려 한 것이다. 이메일을 보내 놓고, 내가 남편의 불륜을 감수하려 한다는 사실에 나도 놀랐다. 남편이 동의한다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살 수 있을까? 솔직히 그럴 자신은 없었다. 어차피 깨진 결혼, 길어야 일 년쯤 버티다 생계만 해결이 되면 바로 자식 데리고 나오는 게 현실적으로 현명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도 잠시, 남편은 내 이메일을 읽자마자 간단하게 답장했다. “이혼 준비해.”
그 즉시 한국, 독일 할 것 없이 나 이혼한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이제 숨기는 것은 없다. 나는 공식적으로 이혼녀가 될 거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메시지가 전송되자 내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수치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이혼 변호사를 알아봤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일단 전화해서 만날 약속부터 잡았다. 이쪽 분야를 잘 아는 독일의 아기 엄마를 통해 보호소를 소개받았다. 나 스스로 이혼을 결정하고 나자 의의로 어려울 게 없었다.
이혼을 실행에 옮겼을 때 내 느낌은 딱 그랬다. 줄을 놓치면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온 몸의 뼈가 부러져 죽을 줄 알았는데 바닥까지 채 10센티미터도 되지 않아 엉덩방아만 살짝 찧은 느낌. 줄을 놓기 전까지는 온갖 무서운 생각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는데, 막상 손을 놓고 보니 내가 매달려있던 곳은 떨어져 죽을 만큼 그렇게 높은 곳이 아니었다. 알았더라면 손에서 피가 나도록 그렇게 움켜쥐고 있지 않았을 텐데, 얄궂게도 직접 떨어져 보기 전까지는 우리 인생에서 그 높이라는 것이 잘 가늠이 안 되는 것 같다.
우리를 쫓는 괴물의 진짜 이름
예전에 마왕 신해철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을 때였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네버 엔딩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마왕이 그랬다. 소설에 보면 괴물이 주인공을 계속해서 쫓아오고, 겁에 질려 도망치던 주인공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Nothing‘s coming!!!!!!!!
그런데 쫓아오는 이 괴물의 이름이 다름 아닌 “Nothing(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Nothing이라는 괴물이 온다는 말은 해석하면 결국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수많은 두려움, 불안 내지는 알 수 없는 공포의 실체를 이토록 상징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지나고 보니 내가 이혼과 관련해 갖고 있던 두려움 역시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이혼을 밝히기 직전에 최대치였던 수치심은 만천하에 공개했을 때 오히려 눈 녹듯이 사라졌고, 생계에 대한 두려움은 그 뒤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지만, 그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 나니 도리어 팔자 좋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이 두려움이라는 것과 몇 번 정면 승부해보니, 참 묘하다. 피하고 싶어 도망갈 때는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거대하더니, 막상 두 주먹 꽉 쥐고 똑바로 쳐다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이 괴물의 실체는 “Nothing”이 맞는 것이다.
독일어로 이런 류의 인간 심리 저변에 깔린 실체 없는 두려움을 “Diffuse Angst”라고 한다. 불안, 걱정, 근심이라는 뜻의 Angst와 무질서한, 산만한, 혼란스러운 등의 뜻을 가진 Diffuse…. 이런 내면의 실체 없는 불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인간은 어느 순간 그로부터 생성된 두려움에 점점 잠식당하고 만다. 이것은 판타지아라는 세계가 낫씽이라는 괴물에게 갉아먹히는 네버 엔딩 스토리의 서사와 유사한 구조이다. 공교롭게도 미하엘 엔데 역시 독일 사람이다. 아마도 미하엘 엔데는 이러한 디푸제 앙스트를 모티브로 네버 엔딩 스토리를 쓴 것이 아닌가 싶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두려움을 이기려면 결국 두려워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생각 없이 살다 보면 다시금 불안하고 초조해질 때가 있다. 낫씽에 의해 내 내면의 판타지아가 허물어지기 시작할 때,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이혼을 결심하던 날과 함께 마왕이 외치던 그 문장, “Nothing’s coming”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 아무것도 오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