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택의 연속, 나를 묶은 올가미를 끊어내는 과정

자유

by 뿌리와 날개

난감한 선택의 연속


남편의 곁을 떠나자마자 내가 마주 한 것은 매일같이 쏟아지는 수십 장의 서류와 사인이었다. 보호소 입소를 위한 서류 절차, 휴대폰 계약, 은행 계좌 개설, 정부에 변호사 비용 청구, 월세 계약, 인터넷 계약, 각종 고지서에 대한 자동이체 동의서에 병원 관련 서류들 동의까지….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서류들에 매일 같이 사인을 했다. 사인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법적으로 고스란히 내 책임이 되는 것인데 제대로 읽고 이해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렇게 사인을 남발한다는 것이 나 스스로 한심했다. 그러나 독일어를 못해도 내 삶은 계속되었다. Learning by doing, 직접 하면서 몸으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처럼 요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전 안 먹던 빵을 먹어야만 했다. 빵집에 갔더니 빵이 수십 종류였다. 무슨 빵을 사야 할지, 몇 개나 사야 할지, 주먹만 한 빵과 수박만 한 빵을 얇게 썰어 파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얇게 썬 빵을 사고 싶으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빵집 앞에 서서 남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용기를 내 들어갔다. 곡물빵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곡물빵도 종류가 너무 많아 도무지 고를 수가 없었다. 결국 가장 싸고 맛도 없는 기본빵을 가리켜 사들고 나왔다. 먹어본 적 없는 새로운 빵보다 맛없어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것이 나았다.


빵을 먹으려면 적어도 버터에 치즈, 살라미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장을 보러 가면 치즈 하나를 사는 것도 힘들었다. 벽면 한가득 못해도 백 종류는 넘어 보이는 치즈가 깔려있었다. 살라미, 쉥켄, 부어스트들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더듬더듬 읽어봐도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결국 남들이 집어가는 것을 따라 집었다. 우유도, 커피도, 세탁용 세재도, 치약도, 샴푸도… 수많은 브랜드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내가 쉽게 집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나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곤욕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나이 스물아홉 먹도록, 치약 하나 내 주관대로 사본 적 없는 바보, 멍청이였던 것이다.


식당에 가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대충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늘 남편이 메뉴판을 읽고 골라줬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식당에 들어갔다가 시간이 꽤 흐르도록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지 못해 진땀을 뺐다. 종업원이 와서 뭘 먹겠냐고 묻는데, 그조차 너무 부담스러웠다. 남편 옆에서도 부끄러워 독일어를 잘 못하던 내가 혼자서 음식을 주문하고 먹어야 했다. 용기를 내 입을 떼도 내 어눌한 발음에 종업원은 재차 되물었다. 돈을 손에 쥐고도 음식 하나 시켜 먹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내 돈을 내가 쓴다는 것의 의미


처음 내 계좌로 돈이 들어왔을 때 아기와 맛있는 것을 먹고, 직접 쇼핑을 했다. 그때까지 쇼핑에 취미가 없던 나는 내 속옷 사이즈도 모르고 살았다. 결혼 전에는 엄마가 사다준 옷을 입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이 사다 주는 대로 입었다. 그런 내가 유럽에 산 이래 처음으로 혼자 쇼핑을 하러 간 것이다. 옷 쇼핑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 중 하나다. 그런데 계좌에 돈이 들어왔으니 기념으로 꼭 쇼핑을 해보고 싶었다. 내 돈을 내가 직접 쓴다는 행위를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 샀던 빨간 원피스는 결국 한 번도 입지 못했다. 볼 때는 예뻤는데 막상 집에 와 입어보니 전체적인 핏이 아주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샀던 가방은 지금까지도 잘 메고 있다.


계좌에 들어오는 생활비를 혼자 결정해 쓰고 사는 생활이 지속되자 나는 점차 재미를 느꼈다. 원래도 물질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었고, 화장도 안 하고 살던 터라 남편에게 받은 생활비 카드로 최소한의 식료품만 사고 살면서도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쓰고 싶은 곳에 내 마음대로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돈을 쓸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돈돈돈돈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모든 자유의 시작은 경제적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해보니 정말, 돈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은 막강한 권력을 의미했다. 나는 정부로부터 최저생계비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그보다 많은 돈을 벌던 남편과 살 때보다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훨씬 풍족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경제력이 주는 자유


돈은 남편이 많이 벌어다 준다고 많은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눈치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쓰고 싶은 만큼 쓸 수 있는 돈이 비로소 내 돈이었다. 실제로 내 생활비는 남편 월급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돈의 액수는 남편과 살 때보다 4배가 늘어났다. 그때 깨달았다. 남편과 살 때 괜찮다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얼마나 돈 때문에 움츠러들어 있었는지…. 남편이 돈을 아끼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돈에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기 옷 한 벌조차 허락 없이 사지 않았다. 가족을 위한 가전제품도 남편에게 묻고 허락을 받았다. 나를 위한 사치품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러고도 불편하지 않았고 행복했다. 돈에 예민한 남편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지, 경제력 있는 남편이 어느새 집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나는 알게 모르게 그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함께 살 때는 몰랐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면 내가 커피도 한 잔 사줄 수 있고, 아기랑 걷다가 힘들면 아무 카페나 들어가 앉아 있어도 되었다. 남편과 살 때는 늘 망설이다 포기하던 일들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나의 행동을 제약하고, 마음을 옭아매 왔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자 나는 날이 갈수록 자유로워졌다.


돈이라는 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내가 벌만큼 벌어서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살면 되는 거라는 것을 깨닫자 먹고사는 일이 그렇게까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내가 나를 책임질 능력이 되면 상대방의 재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나에게 돈을 공짜로 퍼주거나, 내가 그의 돈을 탐내지 않는 한 그가 번 돈은 어디까지나 그의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저 내 앞가림만 충실히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는 배우자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다시는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자 남자를 대하는 나의 태도 또한 당당해지기 시작했다. 소위 말해 꿀릴 게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내 경제력은 내가 갖추겠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당당해졌다.








내 인생을 내가 결정한다는 것


시내에서 우리 집만 가려고 해도,


- 걸어갈까?

- 전철을 탈까?

- 버스를 탈까?

- 친구네 들렀다 갈까?

- 택시를 탈까?

- 이 참에 차를 한대 뽑을까?


인생은 이렇게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인데 그동안 나는 참 결정을 안 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함께였을 때는 언제나 전철을 탔고, 그것이 당연했기에 다른 옵션들은 생각도 안 해봤다. 별로 순종적인 성격도 아니었으면서, 남편의 뜻이 나의 뜻이라 착각하고 생각 없이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과 다른 사람이며, 남편의 결정은 남편 것이고, 내 결정은 내 것이었다. 날씨가 좋고 기분이 좋은 날에는 걸어가도 되고,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 공원을 가로질러 가도 되며, 집에 가다 말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갑작스러운 만남을 가져도 괜찮았다. 원한다면 차를 한 대 뽑아도 된다는 것을 나는, 끊임없는 선택과 그 과정에서 내가 고려해야 했던 수만 가지 옵션들을 통해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두려움과 직면한 뒤 곧바로 내가 얻은 것은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자유였다.


인생의 굵직굵직한 결정들을 스스로 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며 살아온 적이 없었던 나는 결정하지 않고 사는 삶의 의미도 알 길이 없었다. 이제는 안다.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사는 삶이란,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임을. 그리고 이러한 주체적인 결정은, 경제적인 요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내가 경제적인 자유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도.


선택을 할 때마다 나는 그렇게 남편에게 심적으로 묶여있던 올가미 줄을 하나씩 끊어갔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oodtherapy.org/blog/its-for-you-not-them-forgive-to-help-yourself-heal-071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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