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의사소통

by 뿌리와 날개

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 "고압선"에는 어떤 여자를 사랑할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나는 그 소설을 읽을 때마다 독일어를 못하던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외국에 살면서 그 나라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속을 배회하는 유령이 되는 것과 같다.


분명 당신이 그들 사이에 살고 있지만 당신은 때때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들리지도 않는다. 당신이 유령이기 때문에 당신 발을 밟고 지나가도 사과하지 않으며, 그런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당신의 모습은 세상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만 간다.


이런 일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남편이 메뉴판도 대신 읽어주고, 길도 찾아주며,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도 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유령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남편과 떨어져 밖에서 독자적인 시간을 보낼 때면 비로소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것도 순간적일 뿐이다. 나는 이제 막 독일로 넘어왔으니 아직 언어를 배울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일은 남편이 해결해주며, 남편 외의 다른 외국 사람들과 깊이 있는 의사소통이 필요할 정도로 유의미한 관계를 나누지도 않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형체가 살아나고 괜찮아지지 않는가!


문제는 현지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그렇게 여유를 부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고,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서도 당신의 존재가 유령이 되어간다는 것에 있다. (물론 나처럼 언어를 채 배우기도 전에 결혼생활이 일방적으로 끝나는 경우도 상당하다.)


남편이 당신을 무시하기 시작하고, 그 사랑스럽던 우리의 아이들 역시 머리가 굵어질수록 나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내가 사는 세상과 삶 속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고 개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무료한 일상을 달래고자 한국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컬투쇼였다.


한국에서는 시끄럽고 정신 사나워 시그널만 들려도 돌려버리던 프로그램이었는데, 두 엠씨의 에너지 넘치는 진행과 배꼽 빠지는 사연들은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타국에서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어느 날 '중랑천 자전거 동호회'라는 사연을 듣고 오후 내내 그 생각만 하면 웃음이 터져 나온 적이 있었다. 남편이 오면 꼭 이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고 같이 웃어야지, 했다.


막상 남편이 돌아오고 산책길에 그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독일인 남편에게 한국인 아내가 중국어로 들려주는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의 그 배꼽 빠지던 사연은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엠씨들이 그 황당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눈앞에 선해 깔깔거리며 웃었던 그 이야기.


영문도 모르는 엄마는 새벽 두 시에 들어온 딸내미 등짝을 때리며 '아이고, 이 미친년!' 했다는 소리가 'Crazy Bitch'로 어떻게 번역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이야기를 다 마치고도 웃지 않는 남편에게 이 이야기가 왜 그렇게 웃긴 것인지 설명의 설명을 거듭하다 지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한국어를 모르는 남편과 사는 나는 죽었다 깨나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웃긴 사연 하나조차 함께 나누고 웃을 수 없겠구나!








많은 사람들이 현지에서 현지인 남편과 살면 그 나라 언어를 금방 습득할 수 있을 거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실제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현지인 남편보다 이웃에게서 배우는 독일어가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사실을.


내 부족한 언어 실력을 아는 독일인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복잡하고 실질적 이해관계가 설킨 중요한 이야기들을 독일 생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외국인 아내에게 애써 독일어로 말하려 하지 않는다. 아주 단순화시켜서 공동의 언어로 슬쩍 던져줄 뿐이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 당신, 밥 먹었어?

- 오늘 몇 시에 들어와?

- 주말에 뭐할까?

- 휴가 언제야? / 휴가 어디로 갈까?

- 오늘 잘 지냈어?

- 사랑해, 고마워


이 정도의 기초적인 문장과 만족스러운 섹스 만으로도 한몇 년 국제부부가 같이 밥 먹고 사는 데에는 생각보다 별 문제가 없다.


나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그도 굳이 알려주려 하지 않으며, 남편이 미리 저장해둔 삶의 기본 값에 따라 남편에게 기생하는 이곳에서의 삶은 계속해서 잘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까지 저 단순한 문장들만으로 심도 깊은 인간관계, 복잡 다난한 인생사를 함께 이어갈 수 있을까?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이 말라갈 무렵, 정신을 차려보면 보통 아기는 두세 살이 되어있고, 살림에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집에만 있는 한국인 아내의 독일어 실력은 여전히 답보상태이다.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아기가 아직 어리고, 그러다 둘째라도 들어서면 다시 집순이다.


그런데 남편은 매일 출근을 한다. 그와 비슷한 지적 수준을 가진 여자 동료들은 예쁘게 단장하고 출근해 그와 모국어로 자유롭게 농담도 하고, 함께 하는 일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도 나눈다. 말이 통하는 것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한껏 토론하기도 하며, 그가 사용한 단어 속 미묘한 뉘앙스를 파악해 그가 요즘 느끼고 있는 내면의 숨은 감정을 읽어주기도 한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낮이고 밤이고 황홀했는데, 언젠가부터 아기에 밀려 아내에게 뒷전이 된 남편의 마음이 어쩐지 싱숭생숭하다.


반면, 어쩌다 남편과 함께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하게 되어도, 현지어를 잘 못하는 나는 어느 순간 조용히 혼자 있게 된다.


신혼 때나 연애할 때는 예쁜 나를 늘 자랑스러워하며 옆에 끼고 일일이 통역과 소개를 해주던 남편도 어느새 나를 떠나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드느라 바쁘다.


두 사람 사이에 우뚝 선 언어의 장벽은 살면 살수록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조금씩 높고 두꺼워지며, 종국에는 견고해지고 만다.








참, 소설 속 그 남자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몸이 사라질 거라던 점쟁이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다 결국은 완전히 희미해져 사라지고 만다.


아무도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사진출처 : Sharomka/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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