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외국인 남편과 사는 한국인 아내가 언젠가 그런 글을 썼다. 결혼이 아니라 큰 아이를 입양한 것 같다고. 남편이 아무리 한국어를 배우고 스스로 일처리를 한다 해도 결국 중요한 일은 모두 자기 혼자만의 몫이라는 것이다.
남편 뒤치다꺼리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자기도 다른 여자들처럼 든든한 남편 믿고 짐을 좀 덜어 버리고 싶다며, 현지인 배우자와 현지에서 사시는 분들은 제발 상대의 노고를 알아달라며 푸념했다. 십분 이해가 갔다.
'결혼을 해서 독일로 넘어가면, 내 남편도 그런 느낌이겠구나.'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언어를 열심히 배우는 한편, 꼭 남편의 사랑과 노고를 알아주리라 결심했었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고 반년이 지난 후부터 한국에서 남은 마지막 대학 생활과 병행해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난생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독일어는 정말 어렵고도 낯설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왕복 세 시간 거리의 유명 어학원으로 부지런히 독일어를 배우러 다녔다.
그렇게 한국에서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어느 정도 문법과 단어를 익힌 채 독일로 왔다.
그러나 막상 독일 현지에서 들리는 독일어는 달랐다. 이미 중국어와 영어공부로 포화된 상태에서 독일어까지 사정없이 쏟아지니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멀지 않은 과거에 즐거웠던 외국 유학생활의 경험이 있었다. 중국의 낯선 도시에서 홀로 처음 시작했던 그때처럼 나는 다시 용감하게 부딪혔다.
말을 못 해도 당당하게 음식을 주문했고, 뭐가 뭔지 몰라도 일단 다가갔다.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읽고 해석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메뉴판의 태반이 낯선 음식이라 먹지 못하고 남기는 일도 잦았다.
제시간에 오는 법이 없기로 악명 높은 독일 기차를 타고 어학원을 다니며 기차 연착 및 플랫폼 변경, 열차칸 변경 같은 혼란을 겪을 때면 혼이 쏙 빠졌다.
하루는 장을 보고 50유로를 냈는데 점원이 20유로를 받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착각한 줄 알고 지갑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 방금 ATM기에서 찾은 50유로가 없었다.
내가 또박또박 항의하지 못하자 그 점원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곤조곤 나에게 내가 틀렸음을 설명했다. 바쁜 시간대, 계산대 하나를 차지하고 실랑이를 벌이는 우리 두 사람은 금세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얼마나 뻔뻔하게 우기던지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점장이 왔고, 그녀는 포스기를 들고 점장과 사무실로 들어가 돈을 셌다.
한국 같으면 빨리빨리 다른 줄로 옮겨 계산하고 나갈 법도 하건만, 고지식한 이 독일인들은 빈 계산대 앞에 계속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제발 내 말이 맞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영겁 같은 시간이었다.
당황스러움, 억울함, 부끄러움, 수치심, 두려움, 불안함 그리고 서러움까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복합적인 감정들.
결국 내가 옳았지만, 점원이나 점장 그 누구도 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 모든 과정이 내가 처음으로 당한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남편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무엇을 해도 나라는 사람은 독일 땅에서 비효율 그 자체였다. 독일인 남편이 나서면 2-3분이면 해결될 일을 나 혼자서는 반나절을 헤매도 실수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고, 오류를 바로잡고, 그러한 시행착오 과정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경제적 손실을 메꾸는 것은 모두 나의 법적인 남편 몫이었다.
혼자서 유학생활을 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사고를 칠 때 치더라도 모든 불이익과 손실을 혼자 감당하던 유학생 때와는 달리, 이곳 독일에서는 남편과 법적으로 묶여 있었다. 내가 실수를 하면, 법적으로 남편이 연관되는 것이다.
나는 점점 기가 죽었다. 주눅이 들었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도움이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폐는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내 입맛을 잘 아니까 남편이 시켜주는 메뉴를 먹었고, 남편이 길을 아니까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남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 알았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 했다. 해도 되는지 안되는지 판단이 어려우면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이 괜찮다고 하면 했고, 아니라고 하면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우리의 삶이 금세 안정화되었다.
나보다 머리가 두세 개씩은 더 있는, 장벽같이 거대한 코쟁이들 틈에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사랑 찾아 부모님 품을 갓 떠나 독일에 온 나는 한없이 작았다.
춥고 싸늘한 날씨에 몸도 마음도 잔뜩 얼어, 낯설고 어색한 이 도시에서 그저 아는 얼굴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고는 내 남편뿐이니 그 사람 옆에 꼭 붙어있었다.
남편은 작은 새같이 바들거리는 나를 품에 안고 늘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의존은 그렇게 조금씩 시작된다.
처음에는 믿음이라는 상자 속에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덮여 선물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상대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해 타지 생활에서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다가 어느 순간, 겉껍데기가 사라지고 나면 의존이라는 알맹이만 남는 것이다.
국제결혼에서의 의존이 흔한 이유는, 이것의 본질이 결국 혼인 관계에서 비롯된 자생력 없는 이민이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 독일로 먼저 넘어와 스스로 정착하는 과정만 몇 년 거치더라도 이 정도까지 의존이 심각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법적인 혼인 관계를 가지고 남편이 사는 현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것이 크든 작든 모든 불이익과 손실을 함께(실질적으로는 현지인인 배우자가 혼자) 해결하고 감당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배우자는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고 배우는데 자유롭지 못하다. 상대방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현지인 배우자 역시 이민 프로그램을 도와주는 조력자로서 훈련받은 전문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 새 신랑일 뿐이다.
개인 성격도 물론 한몫을 하겠지만, 배우자의 시행착오로 내 삶의 안정성 역시 흔들리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편안하게 손 놓고 앉아 마냥 기다려주기만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자꾸 곤경에 처하지 않는가!
이렇게 시작된 의존적인 생활은 해가 갈수록 처음보다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 않는다. 의존에는 언젠가부터 새로운 환경이나 도전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 같은 감정들이 들러붙어 스스로 몸집을 불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심해져 조금씩 바깥출입이 줄어든다. 어차피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안은 잘 굴러가고, 어설퍼도 이 정도면 남편과 의사소통은 그럭저럭 되니 일단 아이나 잘 키우자 싶다. 남편도 그러기를 원한다.
그렇게 살다 어느새 권태로움에 뒤를 돌아보면 세월은 훌쩍 지나있고, 처음 결혼했을 때 남편이 사랑에 빠졌던 그 때 그 당당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거부감을 먹고 거대해진 의존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이란 갑옷까지 걸쳐 이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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