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부부들이 그렇듯 국제부부에게도 권태는 찾아온다. 그러나 사랑 하나만 믿고 덜컥 결혼해 살아가던 국제부부에게 찾아오는 권태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일단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거리감이 상당하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깊은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잘조잘 말을 잘하는 사람이든, 입이 무거운 사람이든 두 사람이 함께 맞춰가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심중에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 많기는 매한가지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살아도 배우자와의 대화는 쉽지 않은 법이며, 말이라는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할 정도로 섬세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겨우 하고 사는 수준이라면 과연 말로 갈등을 풀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나를 중심으로 자아가 형성된 독일인 남편과 우리를 중심으로 자아가 만들어진 나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정서적 괴리감도 상당하다. 이것은 살면 살수록 더 커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황스러운 것은 이러한 두 사람의 갈등이 시작되면, 그와 나 사이에서 시댁의 존재감이 점점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아내는 이내 우리의 결혼 생활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독일의 시댁은 얼핏 보면 자유로우며 우리의 결혼생활에 있어 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처럼 대놓고 권위와 통제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역학관계에 있어 현지인 배우자의 가족, 친지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물리적으로 가까울수록, 가족관계가 돈독할수록 더 그렇다.
예를 들어, 독일인 시부모가 바로 옆 동네에 산다고 하자. 시댁 식구들에게 경조사가 생기거나 주말, 크리스마스 같은 때가 되면 옆 동네 시부모님 댁을 찾는 일은 자연스럽다. 이것이 반복되면 일상이 되며 아이가 태어나면 더 밀착된다.
부부간에 사이가 좋을 때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면 묘한 힘의 논리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것이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고방식으로 인한 갈등일 경우, 아무리 중립적이고자 하는 시댁 식구들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레 남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아들의 말과 행동은 그들의 통념에서 일리가 있고 명쾌한데 반해 외국인 며느리의 말과 행동은 본인들이 알아오던 상식과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고 잘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대놓고 남편의 편을 드는 말이 아닐지라도 지나가는 말로 동조하는 추임새를 넣는다거나, 돌아가는 집안 분위기가 남편 쪽에 더 힘을 실어준다면 나의 주장은 슬그머니 꺾이게 되어있다.
세 사람만 모여도 둘이서 한 명 바보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진대 하물며 남편의 모든 가족, 친지, 친구들이 이 사람 등 뒤에 서있다. 나는 혼자다.
가스 라이팅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이는 요즘이다.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독일은 원래 그렇다고 말해서 나도 그런 줄 알고 산 세월이 억울하다는 한국인 며느리들의 한탄이 적지 않다.
꼭 대치상황이 아니더라도 다수 사이에서 소수로 지내는 상황 자체가 반복되면 나의 기세는 자꾸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다수의 에너지에 눌린다. 남의 땅에 터를 잡고 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한국인 남편을 둔 여성들이라도 경제력 없이 결혼생활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남편 돈 쓰는 일이 참으로 눈치 보이는 일이며, 때로는 더럽고 치사하게도 느껴진다는 것을.
모든 관계에는 어떤 식으로든 힘의 논리가 작용하기 마련이며, 이것은 비단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부부 관계, 심지어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남녀와 상관없이 경제력의 차이가 크거나 한쪽이 아예 경제력이 없는 경우, 시간이 갈수록 가정 내에서 발언권이 적어지며 입지가 작아진다.
휴가지를 정할 때에도, 이사를 결정할 때에도, 심지어 오늘 저녁 외식을 할지 말지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조차도 나의 목소리는 자꾸 작아진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이 모여 두 사람의 삶을 형성한다. 결국 경제력이 작거나 없는 사람은 경제력이 크거나 있는 사람에게 종속되며, 경제력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국제결혼으로 인한 이민에서 많은 경우, 현지인 배우자가 외국인 배우자에 비해 더 안정적인 직장과 높은 수입을 갖는다. 보통은 두 사람의 나라 중 본인들이 경제적으로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국가로 이민을 택하기 때문이다.
또 그 현지인 배우자가 남성일 확률이 높다. 결혼의 특성상 여성에게는 임신과 출산 및 육아가 뒤따르다 보니 현실적으로 경력의 단절이 생길 수밖에 없는 여성보다 남성이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는 것이 가정 경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2022년 현재에도, 국제결혼 및 결혼이민으로 형성된 독일의 한독 가정에서는 독일인 남편이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지고 가정 내에서 우위에 서며 한국인 아내는 전업주부인 경우가 빈번하다.
생활비를 쓰는 것에도 눈치가 보이고, 한국에서 누군가 놀러 와 우리 집에서 묵고 싶다고 해도 남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친정 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러 온다고 해도 명품 백은커녕 왕복 비행기표 하나 시원스럽게 끊어드리기 어렵다.
분명 결혼할 때 나는 그의 공주님이었는데, 콩깍지가 벗겨지고 보니 어느새 가정 내에서 나의 입지는 그렇게 달라져있는 것이다. 조금씩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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