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 타깃층인 "순진한 결혼 이민자"들은 대부분 그 나라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다가 우연히 그 나라 남자와 사랑에 빠져 이민을 택한 여성들이다. 그렇다 보니 20대 중반이 훌쩍 넘어 사랑 때문에 생뚱맞은 외국어와 고군분투하는 일이 다반사다.
물론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건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은 내 쪽이므로 자기 계발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쁘지 않다.
어떤 이들은 그 나라 언어를 배우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 비싼 돈을 주고 유학도 하는데, 우리는 배우자 덕에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언어 배우기에만 전념하면 되니 언뜻 일거양득인 것도 같다.
또한 둘 중 한 사람에게는 모국어이기 때문에 둘 모두에게 외국어인 언어로 대화할 때보다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 적어도 한 명은 섬세하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므로 상대 배우자의 문법적 오류를 교정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향상된 외국인 배우자의 언어구사력은 두 사람이 더 친밀하고 속 깊은 대화를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것은 매끄러운 부부생활에도 큰 도움을 준다.
문제는 언어가 가진 본질 중 하나가 권력이며, 평등해야 할 부부관계가 시작부터 이미 한 사람에게 그 권력이 대부분 이양된 채 시작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된 부부관계는 망가질 때에도 가속이 붙는다.
일단 외국어 실력은 생각보다 쉽게 늘지 않는다.
20대 초중반이 훌쩍 넘어 시작된 언어 공부는 더욱 그렇다. 현지인 배우자와 그 나라에서 살면 외국어가 술술 늘 것 같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이것은 초반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외국어 실력의 향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단과 같아서 정체기와 성장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이때 정체기를 깨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국제결혼을 선택한 모든 사람들이 외국어에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외국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외국어와는 담을 쌓고 살다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고, 배워도 배워도 외국어에 영 재능이 없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을 잘하든 못하든 가정은 굴러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남편이 나 대신 많은 일을 처리하고 결정할수록 나의 입지는 줄어든다.
그런 내가 언제쯤 남편의 모국어 실력을 따라잡게 될지, 그렇다고 해서 뒤늦게나마 가정 내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갖게 될 수 있을지 그 조차 미지수이다.
더 큰 문제는, 언어를 배우려는 나의 노력이 채 빛을 발하기도 전에 우리의 결혼생활이 끝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봐도 결혼하고 첫 3년까지 이혼율이 가장 높다. 그나마 신혼이고 콩깍지가 씌어 다들 버텨내는 것이지 사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느라 정말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기간인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를 맞춰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남편의 언어를 부지런히 배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와 불만은 쌓여가며, 부부생활이 삐그덕거려도 쉬어가지 못하고 계속 살아내야 한다.
권력을 독점한 현지인 배우자가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에 얼마나 인내심을 갖고 당신을 기다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부분의 "순진한 결혼 이민자들"의 경우, 바로 이 과정에서 현지인 배우자에게 이혼 통보를 받는다.
자녀의 존재는 언어에서 비롯된 가정 내 권력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 아빠와 한국 엄마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예로 보자. 특별한 노력이 없는 한, 가정 내 공용어는 자연스럽게 독일어가 될 것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나마 엄마랑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되지만, 뼈를 깎는 수고가 동반되지 않으면 벌써 유치원만 가도 독일어와 한국어의 우위가 바뀐다. 학교에 들어가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진다.
지적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에 교육과정 대부분이 독일어 인풋인데 아웃풋이 한국어로 나올 리 없다. 학교에서 배운 우주 대폭발과 혜성, 화산 분출과 지진에 관한 내용을 집에 와서 신나게 설명하고 싶은데 한국어로는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청소년기로 접어드는 아이들은 또래집단으로부터 슬슬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따돌림을 경험하기도 한다. 한국어를 하는 아이에게 "칭챙총창"이라며 모멸감을 주기도 한다. 크건 작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는 독일 사회에서 놀림거리나 되는 한국어에 관심이 없으며, 배우려는 동기도 점점 바닥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국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엄마 아빠의 권력관계를 보고 익힌다. 가정 내에서 이미 언론과 경제를 장악한 아빠는 완벽한 독일어를 쓰고, 사회생활 없이 살림만 하는 엄마는 그런 아빠와 어눌한 독일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독일어는 집 밖에서는 살아있는 언어, 쓸모 있는 언어이자 집 안에서는 권력자의 언어인 셈이다.
가정 내에도 힘의 우위에 따른 적대관계와 친목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남편에게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는 아내는 자녀들에게도 존중받기 힘들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눈 가리고 아웅이 가능했지만 더 이상은 어렵다. 불평등한 부부 관계, 일방적인 상하 관계는 본인보다 자녀들의 눈에 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직 중 삼사의 관리를 임명하는 이조 전랑이라는 직책이 있다. 삼사는 여론 기관이므로 이조 전랑이 그 관리를 임명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궐 안에서 원하는 대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우리는 권력이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조 전랑이라는 관직 자체는 낮았지만 실직적 권한은 막강했다.
전 세계적으로 한글을 놀랍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정보의 독점 및 통제는 권력의 절대성과도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이런 권력을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일반 백성들과 널리 나누고 싶어 창제했다니, 이 발상 자체가 파격인 것이다.
과거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다스릴 때에도 말은 가장 중요한 통제수단이었으며, 어떤 나라든 정치인들은 여론에 민감하고, 부당한 정부는 언제나 언론을 탄압한다. "말"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인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말"을 가정 내에서 한 사람이 독점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의견의 대립이 생길 때면 그 사람만큼 야무지게 말로 대응할 수 없고, 내 입장을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다. 같은 양의 정보를 획득하는 데에도 시간이 훨씬 많이 들고, 그 마저도 정보의 옳고 그름이 불분명하다.
살아가며 점차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권력은 가정 내에서 점점 더 공고해질 것이며 그러한 결혼생활마저도 나에게 얼마나 허락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권력의 독점을 그에게 처음부터 내어주는 것, 바로 현지인 배우자의 모국어로 살아간다는 것의 숨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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