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 세월이니 그 사이 동거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으리라 짐작한다. “결혼을 전제로 한다”는 조건 하에 동거 사실을 밝히는 커플도 과거에 비해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결혼 전 동거는 남녀 불문하고 여전히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결혼 전 다른 이성과 동거 경험이 있는 남녀는 각기 방탕하고 책임감 없는 남자, 문란하고 헤픈 여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며 이러한 도덕적인 비난은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나눈 섹스조차도 이별할 때에는 여성을 협박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그러한 인식이 통용되는 사회이지 않는가. 한국사회가 동거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과연 독일의 동거문화를 어느 정도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일에서 동거 없는 결혼은 거의 상상이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한국적 정서로 비교해보자면 2022년 현재, 이제 두세 번 만난 상태에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모르지만 대화가 꽤 잘 통하는 것 같아 결혼을 결정하는 커플과 비슷하달까?
독일인 연인과 독일에서의 결혼생활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반드시 동거부터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결혼과 동거, 둘 중에 딱 하나만 고를 수 있다고 해도 차라리 동거를 고르라 하고 싶다.
이러한 권유에 수긍 대신 의문 또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더더욱, 결혼은 반드시 미루고 동거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독일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 동거를 불편해하는 것 자체가 이미 두 사람의 문화적 간극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동거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의 20-40대들이 왜 결혼을 거부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그 이유를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본다.
첫 번째는 이들이 부모 세대의 가정불화 및 이혼으로 인해 상처가 깊은 세대라는 것이다.
이미 어린 시절, 부모를 통해 이혼, 재혼, 배 다르고 씨 다른 형제자매의 존재 등 가족관계의 파탄과 그에 따른 거의 모든 부작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에 이들은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가 없다.
두 번째는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그에 따른 결혼의 기능 및 의미가 독일 사회에서 퇴색한 지 오래라는 점이다.
이 세상은 "나"와 "나의 행복"을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설사 결혼 계약이라 할지라도 그에 반한다면 언제든 파기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다시 안정성 없는 결혼제도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야기한다.
세 번째는 이혼으로 인한 번거로움, 감정 소모 및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점이다.
서류의 나라답게 작성, 증명, 제출해야 할 서류가 끝도 없으며 두 사람의 소득에 따라 이혼 비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많이 벌수록, 또 합의가 안될수록 돈이 많이 든다.
무엇보다 독일인들은 감정 소모에 대단히 취약하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느니 차라리 결혼을 기피하고 마는 것이다.
네 번째는 동거와 혼외자녀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와 복지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를 떠날 수 있는 상대와 이혼의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결혼제도를 굳이 강행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나는 이 모든 현상을 관통하는 핵심적 이유가 독일인들의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또는 인간을 향한 근본적인 회의감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것은 남녀관계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독일은 한국보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대략 한 세대 정도 앞서 있다. 현재 한국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결혼과 다양한 가족 형태"를 둘러싼 각종 사회적 이슈는 이미 30여 전 년 이 사회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지금 30,40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동거, 결혼 및 이혼에 대한 시각은 현재 독일의 60,70대와 비슷하다. 쉽게 말하면, 현재 한국의 MZ세대가 기른 자녀 세대가 오늘날 독일의 20-40대들이라는 것이다.
집에서는 아무리 부모라 해도 성인자녀의 사적인 성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밖에서는 미혼 남녀의 섹스나 동거에 대한 사회적 낙인, 결혼에 대한 압박 등이 없다.
연인과 헤어지기 싫으면 몇 날 며칠이고 우리 집이나 상대방의 집에서 머물면 된다. 각자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언제든 함께 휴가도 갈 수 있으며 사회적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지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쉬면 된다. 독일인들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주말에 남자들은 여자 친구나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여자들은 남자 친구의 동의 없이도 친구들과 클럽에 가고, 여행도 간다. 각자의 사생활을 자유롭게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독일인들은 굳이 결혼이나 동거를 하지 않아도 연애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동거만 해도 법적으로 서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에 동거 없는 연애 상태가 사실 투자 대비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동거란, 남녀관계에 있어서 정말 진지하고 무거운 일이다. 내가 너와 자녀의 출산 및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무언의, 그러나 강력한 메시지이며 우리 관계에서 즐거움을 넘어 상당한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독일 사회에 남녀의 섹스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잣대도,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성생활에 대한 사회적인 낙인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들도 나에게 간섭하지 않고, 나 역시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시대가 한국에도 도래한다면 한국인들의 선택은 과연 다를까?
사실 한국도 이미 동거문화가 널리 퍼지고 있다. 결혼식을 올려놓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부부들이 바로 그러한 예라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남의눈을 의식하는 풍조 속에서 나름 최소한의 실리를 따지는 절충된 장치, "한국식 동거"라고 해석한다.
독일이나 한국이나 날이 갈수록 결혼과 가정의 의미가 약화되고 과거에 비해 쉽게 갈라서는 커플이 늘어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독일인들은 때로는 병적으로 보일만큼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매일 늘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던 독일의 철학자, 칸트를 보자.)
불안정한 인간의 감정에 기댄 낭만보다 내 삶의 안정성과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인들, 타인을 믿고 타인과 깊게 관계 맺는 것에 두려움이 큰 독일인들에게 법적으로 남남이 얽히는 결혼제도는 말 그대로 엄청난 모험이다.
그래서 이들은 침대 위에서 팬티는 쉽게 벗을지언정 사랑한다는 말, 연애로 맺어질 인간관계에는 신중하고 또 신중한다. 동거 역시 마찬가지이며, 같이 살면서 아기는 낳을지언정 결혼은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독일 남자와 결혼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더군다나 함께 하는 곳이 독일이라면 동거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분위기를 파악하기 바란다.
그는 한국 남자가 아니고, 이곳은 한국 땅이 아니다.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한다면, 불안과 두려움에 기인해 결혼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조금씩 맞춰 나가며 진정으로 관계의 돈독함을 다져가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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