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뿌리와날개 Sep 04. 2024

전남편

독일인 전남편과의 이혼 전후로 달라진 남자 보는 눈

안녕하세요, 뿌리와 날개의 인생수필 두 번째 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전남편과 결혼할 때 남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봤던 게 뭔가요?”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 결혼을 결정하던 그 당시 제 수준에 비해서 너무 고상하고 고차원적인 질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누군가를 조목조목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할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여기에는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자기혐오가 심하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안 되는 걸 넘어서 저 자신이 너무나 형편없다고 생각했던, 정말 자기혐오의 끝을 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감히 그런 멋진 남자를 평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저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고, 결혼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했죠!


두 번째는, 너무 어려서 기준이 없었습니다. 전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제 나이가 만 스물셋이었고, 학교 밖을 나가본 적 없이 연애나 몇 번 해본 게 다인데 사람 보는 안목이 있으면 또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만나는 남자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인간군상에 대해서 평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 보는 안목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저는 배우자를 고르는 안목은커녕 일단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가야 하는 미숙한 사람이었어요.


마지막 세 번째는, 제가 내면에 아주 긍정적인 남성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이들의 첫 번째 이성으로서의 모델이 자기 부모님이잖아요? 딸은 아빠, 아들은 엄마!


그런데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아주 관계가 좋았단 말이죠. 그래서 특별히 불쾌한 인간이 아니고서야 기본적으로 “남성”에 대해서 경계심보다는 우호적인 감정이 컸고, 이성관이 비뚤어질 법도 할 만큼 나름 모진 풍파를 겪어낸 지금도 그래서 여전히 남성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입니다.


이 부모로부터 각인된 첫인상이 얼마나 강력한 지 잘 안 바뀌어요. 그리고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듯, 이런 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적인 상은 아직 세상을 겪어보지 못한 어린 여성에게 특히 치명적인 대미지를 안겨주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상대방을 그렇게 조목조목 뜯어보고, 따져보고 결혼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저는 결혼이 무척 하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열아홉, 스물, 스물 하나, 스물둘, 스물셋까지 이미 5년 가까이 너무나 결혼이 하고 싶은 상태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단 말이죠.


특히 전남편을 만나기 전 몇 번의 연애들이 결혼이라는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결국 이별로 끝나는 걸 보면서 어린 마음에 실망과 상처가 컸어요. 그래서 맨날 만나고 싸우다 헤어지고, 만나고 싸우다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이 연애패턴이 정말 지긋지긋했습니다.


나는 그냥 평생 함께할 단 한 사람을 만나서 안정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이 사람도 또 그저 그런 시답지 않은 연애나 하자고 수작 거는 게 참 지루하더라고요.


저는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결혼이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이자, 두 사람의 관계를 단단히 지켜주는, 연애나 동거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 대단한 건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결혼에 목을 맸던 거고.


그래서 이 남자가 자기는 독신주의에 딩크라길래, 어차피 별 관심도 없던 남자가 인생관도 저랑 안 맞으니까 나는 결혼도 하고 싶고, 아기도 여럿 낳고 싶고, 무엇보다 외국인이랑 결혼 없는 연애에는 전혀 관심 없다고 단호하게 밝혔어요.


그랬더니 이 남자가 갑자기 말을 바꾸는 거예요. 그동안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여자를 못 만나서 그런 거지, 저를 만나고 난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드디어 결혼할 짝을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찾던, 꿈에 그리던 여자라니까 저도 마음이 동하면서 갑자기 눈이 반짝하는 거죠. 결혼하고 싶어 죽겠는데 나랑 결혼해 준다고 하니까!


그런데 이 사람한테 처음으로 고백을 받았을 때, 그러니까 내가 결혼을 원한다는 걸 안 뒤에 그걸 감안해서 이 사람이 정식으로 저한테 사귀자고 고백을 했을 때 분위기가 굉장히 무거웠단 말이에요. 그쪽도 얼마나 진지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진짜 이 말을 믿어도 될까?

우리 만난 지 아직 두 달도 안 됐는데?


그리고 저도 내면이 많이 약해져 있을 때라 굉장히 불안하고, 조심스러웠죠. 그런데 이 사람의 눈빛이 정말 강렬했어요. 그 조용한 방 안에서 오롯이 저에게만 집중한 채로 제 눈을 바라보는데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그런 존경과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이었어요.


안 그래도 이목구비 선이 굵은 사람이, 그런 흔들리지 않는 강렬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톤으로 굉장히 안정적이고 편안한 속도로 저한테,


너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야.

너는 정말 강하고 훌륭한 사람이야.

내가 찾던 더 라이트 원이야!


라고 하는데 그 말하는 입꼬리에도 의지가 굳건했습니다. 저라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정말 그렇게 단호하고 강단 있게 자기 의지를 표명하는 사람을 저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어요. 근데 또 말은 그렇게 남자답고 카리스마 있게 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제 조그마한 손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꼭 감싸 쥐었단 말이죠.


그런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 당시에는 그 사람이 너무나 든든했고, 믿을만했고, 또 이 정도의 진심을 가진 남자라면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든 믿고 내 운명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사람을 믿기로 작정하면 쭉 가요. 내가 선택했으니까 어지간히 자잘한 어려움들은 그냥 감내합니다. 그래서 결정한 뒤로는 별로 고민이 없었어요.








물론 2년 정도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이 사람이 결혼하면 앞으로 이런 남편이 되겠다! 하는 걸 틈틈이 떠올려보기는 했죠. 자기 엄마하고 통화할 때 보면 사이도 좋고,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꼭 자기 할머니 두 분께 카드를 써서 보냈고요.


과거에 강아지를 오랫동안 키웠는데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강아지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무척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술, 담배, 게임은 안 하는데 축구나 조깅 같은 운동을 좋아하니까 오래도록 건강하게 같이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


또 저는 물을 잘 안 마시는데 늘 물을 많이 마시라고 저한테 물통을 건네주었거든요. 그거 말고도 모든 면에서 굉장히 자상하고 섬세하게 저를 챙겨줬어요. 지금은 제가 아이도 키우고 나이도 먹다 보니까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에는 정말 더 말괄량이 삐삐, 개구쟁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잘 챙겨주는 남자가 좋았고.


또 일부러 찾지 않아도 꼭 그런 남자들이 저를 좋아합니다, 지금도. 보통 남자들보다 좀 더 남을 보살피는 걸 좋아하고, 부성애가 있는 편인 남자들. 심지어 제가 좋다고 상대를 쫓아다녀도 항상 상대가 저를 더 많이 챙겨줬어요.


아무튼 그런 꼼꼼하고 계획성 있는 성격도 저의 부족한 점을 잘 보완해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소심하고 결정을 잘 못하는 저와 달리 어려운 결정도 척척하고, 리드하는 모습이 무척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한결같고 근면성실했어요. 이게 남편감으로서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인데, 충동적이기보다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 루틴이 있었고, 놀더라도 항상 자기 할 일은 다 해놓고 노는 그런 면이 남편감으로서 굉장히 안정감 있어 보였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또 휴대폰을 보는 시간보다 독서를 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러면서도 컴퓨터 같은 기계를 잘 다뤘습니다. 그런 스마트하고 지적인 면도 매력적이었어요. 무엇보다 저 말고 다른 여자들한테 무척 단호했습니다.


가끔 한국에 오면 여자들이 이 남자한테 시선을 줄 거 아니에요. 그들 눈에는 외국인이고 잘생겼으니까. 그런데 저는 워낙 눈치도 없고 순진해서 잘 몰랐습니다. 버젓이 애인이랑 같이 있는 사람에게 이성들이 막 플러팅을 한다는 걸.


그런데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한국 여자들이 자기한테 플러팅을 많이 한대요. 그래서 아, 플러팅이 뭐냐고 그러니까 같이 전철을 타고 다니면 막 자기한테 웃고, 윙크도 하고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서 놀라가지고, 그럼 너는 그럴 때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시선을 거두면서 저를 팔로 감싸 안고 제 머리에 뽀뽀를 해준답니다. 그 여자 보라고. 그 말을 듣는데 너무 든든하고,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뭐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도 그런 확신이 있었지만, 그 뒤로도 이 사람이 바람을 피울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의지도 약하고, 이 사람에 비해 많이 부족한 사람이니까 살다가 내가 유혹에 흔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했지만, 이 사람은 절대 저를 배신하거나 뭐 눈을 돌리거나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강한 믿음이 있으니까 결혼을 또, 할 수가 있었겠죠!








그런데 이 모든 건 제가 어리고 미숙해서 아직 스스로의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에 사랑에 빠져서 눈에 콩깍지가 쓰여있을 때 봤던 것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랑 실제로 같이 3년을 살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또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을 보게 되고, 그 사람뿐만 아니라 저 자신에게서도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됐죠. 그리고 이혼 한 뒤에 또 9년 동안 혼자서 아기를 키우면서 깨닫고 배우는 것들도 많았고, 저 자신도 많이 돌아보게 되고.


그래서 남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봤던 것이 뭐냐는 질문은 사실 현재진행형이어야 제가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남편으로서 중요하게 본 게 없이 그냥 제가 결혼을 하고 싶던 차에 저랑 결혼을 하겠다는 남자를 만나서 그가 특별히 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또 기대가 없어서 그랬는지 알면 알수록 하자는커녕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서 결혼을 했던 거고요.


그 모든 일을 겪고 15년이 지나서 싱글맘이 된 지금 남편으로서 어떤 점을 중요하게 보겠느냐라고 한다면, 저는 남편이라는 역할이 그렇게 중요한 거 같지는 않아요.


저는 워낙 안정을 추구해 온 사람이다 보니까 언제 안정을 찾게 됐냐면 이 세상이 불안정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걸 그냥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거든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도가 단단하다고 믿었을 때에는 단단하기 때문에 의지하고 싶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늘 불안했는데,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깰 수 있는 한낱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남편이라는 역할에 대해서도 그가 나의 남편이기 때문에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그런 틀을 두고 보기보다는 그는 나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하고, 형이나 오빠, 동생이기도 하고, 차장님이나 아저씨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가진 “나”라는 본질을 늘 생각합니다.


내가 보는 그는 어떤 인간인가!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사는가!


물을 어느 컵에 담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모양이나 색깔은 늘 변하지만, 물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잖아요. 물론 차가우면 얼고, 뜨거우면 수증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건 특수상황이고, 그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죠.


그래서 그가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겨있는가 보다는 이제는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어떤 인간인지를 지켜보는 편이에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좀 시간이 필요하고.


또 살다 보면 나를 담고 있는 그릇이 깨지기도 하잖아요. 그럼 쏟아져서 땅에 스며들 때도 있단 말이죠. 그럴 때 자기 자신이 그냥 스며들어서 사라지고 마는 물인 지, 아니면 땅 속에 있던 씨앗을 만나서 싹을 틔우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물인 지 그런 것들을 보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을 될 수 있는 한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보려고 하고, 시간의 제한을 두지 않고 관찰을 합니다.


돌싱이 되면요, 그런 게 좋아요. 이미 결혼도 한번 해봤고, 나를 닮은 귀여운 자식도 있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고자 하면 얼마든지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여유는 곧 갑의 위치를 상징하죠!


“갑과 을”이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게 없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이혼할 때 제대로 한방 먹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세상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 힘의 논리, 힘의 우위가 작용한다는 걸 몸소 배웠기 때문에…


말 나온 김에 이 “갑과 을“을 다음 주제로 삼아볼까요? 굉장히 즉흥적인데, 영상을 한번 만들어 볼게요!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을 결정하셨고, 또 그래서 지금은 그 결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들을 하시는지 자유롭게 댓글로 남겨주세요! 오늘도 영상이 즐거우셨기를 바라고, 뿌날의 인생수필과 함께하는 구독과 좋아요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다음 영상에서 봬요! 안녕!


https://youtu.be/bOLcKCyXC-g?si=JkIBsj0gG81s5gYz






매거진의 이전글 자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